1. 송탄의 연혁
송탄지역은 삼한시대에 진한의 영토에 속하였는데 당시의 송탄지역에는 거분활국 巨憤活國(현, 양성시의 양성일대 및 평택시의 평택유역)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지금의 한강 이북에서 내려온 부족이 세운 국가인 진한은 예성강에서 안성천일대를 지배하였는데 시조인 진왕이 죽자 국력은 급속히 세퇴하여 당시 충청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한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마한의 침범을 받는 과정에서 송탄은 마한의 일지국 日支國(아산일대, 안성일대의 부족국가)에 흡수되었다.
부족국가의 발전은 삼국시대로 이어져 고구려, 백제, 신라를 형성하고, 송탄은 한강유역까지 지배한 백제의 영토로서 연달부곡(淵達部曲), 송촌활달(松村活達)로 표기되거나 금산(金山)이라고도 하였다.
고구려가 강성했던 장수왕 시기에는 고구려의 부산현 釜山縣이라 불리웠고신라의 부흥기에 신라의 영지로 변하였으며,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경덕왕 16년(757)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로 나누면서 군현을 정리할 때 한주(한산주-광주, 중원경-충주)의 수성군(현, 수원,화성일대)의 속현으로 진위(振威)라 불리웠다.
고려의 개국 이후 태조 17년(934)에 수성군은 수주로 승격했고 동 23년에는 진위(振威), 송장(松莊), 영신(永新)현으로 넓혀졌다. 성종 14년(995) 전국이 10도로 구분될 때 송탄지역은 관내도(현, 황해도-경기도 일원)에 속하였던 수주의 속현으로 당시 개성을 중심으로 하던 행정부의 변두리(즉 서울권역의 남단)에 해당하였다.
고려 후기인 예종 원년(1106)에 전국을 5도로 나누고 경기, 충청일대를 양광충청도로 불렀으나, 명종 원년(1171)에 다시 원래대로 복귀 시켰으며 충숙왕 원년(1314)에 충청, 하남도를 양광도라 하고, 공민왕 5년(1356)에는 양광도에 수주를 포함하여 27개 군으로 구성하고 충청도로 개칭시키면서 진위현을 포함 총 78현을 두었다.
고려가 쇠퇴하고 조선이 개국한 뒤 도읍을 1395년에 한양으로 옮기면서 정치권역인 경기도의 행정구역 확장이 필요하여, 충청도의 양주,광주,행주,김포,처인(현, 용인)을 경기도에 이관하였고 3년 후에 진위를 경기도에 속하게 함으로써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귀속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태종 13년(1413) 충청도의 여흥, 안성, 음죽, 양성, 양지가 경기도로 이관되었으며, 수원은 도호부가 되고 이 때에는 진위 주변의 군현들이 경기권역에 들게 되었다.
세종 6년(1424)에 진위현과 송장현을 합하여 진위현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후 고종22년(1896)에 이르러서 전국을 23부 339군으로 세분할 때 공주부 진위군으로 하였으니, 현에서 군으로 되는 기간은 긴 세월이었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도제를 부활하여 13도 339군으로 개편함에 경기도 진위군이 되었고, 이때 평택군은 충청도에 속하였다.
일제의 침략기인 1910년 한성은 한성부로 개칭되고 1914년 3월 전국이 12부 218군이 될 때 진위군은 충청도 평택군을 흡수하여(서북, 서탄, 송탄,고덕, 병남, 청북, 포승, 현덕, 오성, 부용, 서면등) 11개 면으로 하여 공주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 진위군의 탄현, 송장면 등과 인근의 여방면의 일부가 병합되어 송탄면이 만들어졌다.
1924년 진위군은 경기도 평택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방된 후 남북이 나누어진 상태에서 1946년 서울시는 특별시로 1949년 인천, 수원, 개성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송탄면은 인구가 급증하고 미군이 주둔하여 행정력 강화가 요구됨으로서, 1963년 10월 송탄면은 평택군 송탄읍으로 승격되었다.
도시화 근대화의 물결속에 송탄읍의 인구는 1981년 5만을 넘어서고, 그 해 7월 1일 법령 제3425호에 의거 송탄시로 승격되어 평택군에서 분리되었다.
평택군은 송탄이 떨어져나간 뒤 평택읍, 팽성읍과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오성면, 청북면, 포성면, 현덕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1986년 평택읍이 평택시로 승격하여 분리가 되었다.
1995년 5월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을 각각 폐치하고 도농복합형태의 폄택시가 설치됨으로써 송탄시는 시市로 승격된지 9년만에 그 이름이 송탄시민의 기억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 충 동 (二 忠 洞)
송탄에는 이충동이는 동네이름이 있는데 이 이름의 유래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 두사람과 관련이 있다. 조광조와 오달제가 그들인데 조광조는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로서 야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중종때의 사림파의 우두머리였다. 그 때에 정권을 잡고 있던 훈구파에 맞서서 혁신적인 정치를 펼치다 기묘사화로 서른일곱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오달제는 그 보다 나중의 사람으로 병자호란 때 윤 집, 홍익한과 함께 청나라와 싸우자는 주전론자을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죽었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지금의 이충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이충동이라는 마을이름은 이 두 충신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쑥고개 사연
송탄시는 해방 전까지 농가 삼백가구 쯤이 농사와 숯을 구워 파는 가난한 마을이었던 신장동에서 도시의 기틀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신장동은 본디 숯을 굽는 언덕배기라는 뜻으로 숯고개로 불렸는데 이것이 쑥고개로 잘못 불리다가 굳어져서 진짜로 이름처럼 되어 버렸다.
비행장이 건설되기 시작한 때에는 6.25가 끝날 무렵인 1952년 12월이었다. 이 공군기지는 ‘오산공군기지’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50년대 초반에 송탄의 북쪽에 있으며 서울이나 수원에 더 가까운 오산읍이 이 외국 부대의 위치를 설명하는데 더 편리했기 때문에 붙여진 듯 하다.
처음에 서정동으로 나 있던 미군 기지의 정문이 1954년 신장동 쪽으로 옮겨왔고 기지촌은 서정동과 신장동을 잇는 철길 둘레에 이루어졌다.
정문을 향해 난 길 양쪽으로 가게들이 늘어나고 시작하고 80년대 중반에는 이 지역에 6만6천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기지로부터 1평방킬로미터 이내에 이 인구의 약70퍼센트가 있었다. 1980년대 초까지 송탄은 술집과 주택이 뒤엉켜 지역전체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으며 도로가 비좁고 정비가 되어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뒤 도시 정비 계획을 이루어 나갔고 생산공장들이 입주하기 시작하여 동아자동차 공장과 삼화제관과 같은 공장들이 세워졌다.
90년대에 들어서서 송탄공단과 장당공단이 조성이 조성되는 등 생산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지금은 과거 무질서한 기지촌의 모습은 사라지고 아담한 도시와 농촌의 모습이 어울어진 모습으로 2000년을 맞이하고 있다.
– www.st119.or.kr에서 발췌
자연마을유래 및 문화유적(가나다 순)
갈평마을 : 조선 중기에 형성되고 갈대가 무성하고 넓은 평야가 있다하여 갈평이라 하였다. 옛적부터 큰강이 마을을 통하고 있었다고하나 그 흔적이 없어 전해지는 이야기로만 남아 있다.
[문화 유적:이 괄의 난 때 이 괄이 먹었던 우물]
건지(乾芝)마을 : 약 450년 전 형성된 마을로서 지산천(芝山川)을 경계로하여 동북은 양달말, 서남은 응달말로 불렀고 양달말 뒷산 너머에는 큰 북어울, 작은 북어울이라 불리는 습지대가 있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 곳은 옛적에 큰 내가 흐르고 북어가 잡히어 말리던 곳이어서 건지라고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을이 떼가 마를 정도로 건조하여서 건지라 했다고도 한다.
[문화 유적:지명설화, 용호 약수터, 장군 약수터]
구장(舊場)터마을 : 조선 때 진위현의 장터가 있었다고 전하며 일정 때 면 소재지가 되기도 하였던 마을로 진위천을 낀 현재 송탄 북쪽 서탄면 경계에 위치한 기름 졌던 마을이다.
광귀(廣歸)마을 : 대략 1960년경에 광천 부락 뒤편으로 귀 농민 20여 세대가 정착하였으며 당시 광천 마을에서 분리 되면서 광자를 따고 귀농의 귀자를 따서 광귀라 하였다.
광천(廣川)마을 : 마을 앞에 넓은 내가 흐르고 돛단배가 왕래 하였다하며 이를 인하여 광천이라 하였다. 원장당에서 갈라진 마을이다.
[문화 유적:엄나무(수령405년,높이18m,둘레7m)]
남산터 마을 : 마을의 유래는 제역마을의 일원과 같다고 할 수 있으며 원산(猿山)이라는 산이 있어 그 명칭의 변형으로 남산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추정을 할 뿐으로 남산터란 말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내리(內里)마을 : 도일리 가운데 마을이란 뜻으로 내리라 하였고 석비, 운터 말, 새말, 깊은 골, 능말, 갓골, 안말등의 골짝으로 형성 되었다.
[문화 유적:원균 묘(도 지정 문화재), 옷 우물 샘, 숫돌 고개, 석자의 묘, 약천사]
동령(東嶺)마을 : 동령 마을에 대하여는 1759년경 간행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당신 진위현 송장면 동령리로서 그 이전 송장현 이었을 때 현의 현치소(군 주둔지)가 동령에 있고 토성이 있었다 하는데 이 토성은 고려 초기때부터 전략 요충지로 써 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잔해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마을 이름은 동쪽으로 재가 있어 동령(東嶺)이라 하였다.
[문화 유적:조광조, 오달제의 유허지비 및 충의각, 우물제사(정월 첫 용 날)]
동막(東幕)마을 : 조선시대에 삼남대로가 지나고 있어서 대로상에 주막이 형성되고 동쪽으로 골짜기 사이에 마을이 이루어지면서 동쪽 막바지에 있다하여 동막이라 불렀다. 진위현 마산면에 속하여 있다가 일정 후 탄현면, 일탄면을 거쳐 송탄면에 소속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 유적:동막 저수지]
막곡(幕谷)마을 : 조선시대에 진위현 여방면에 속했던 이 마을은 원래 방효리(현 방여울)라 했다. 막곡이라 불리는 것은 6.25전란 후 면의 행정 개편시 방 여울을 방혜동, 막곡, 중리로 할 때부터였으나, 막곡이라는 말이 유래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이 곳은 마을 뒤편으로 산이 있는데 그 산의 형세가 흡사 성(城)과 같이 보이고 산을 넘는 고개 길을 성현(城峴), 성재라고 하였으며 그 아래 있는 마을이 군의 막사 같아서 막곡이라 하였다.
[문화 유적:최남순 시혜 불망비]
모곡(茅谷) 마을 : 조선 중기에 형성었되고 광활한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도롱이라는 비옷을 만들 때 쓰는 띠의 재료인 풀이 무성하였다하여 띠모(茅) 골곡(谷)자를 써서 모곡이라고 했다 한다.
[문화 유적:전주 이씨 사당 1간, 향나무 1그루(수령 500년)]
목천(木川)마을 : 옛적에 이 마을 앞으로 커다란 내가 흐르고 이 내는 현 진위천(통상 하북 냇갈)로 흘러 서해로 빠졌다 하며 이 내의 좌우에 나무숲이 무성하고 나무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있어 나무 내라 하였다. 일설로는 홍수 때마다 큰 나무가 떠내려와 주민들이 건져 땔감으로 썼다하며 이로써 나무내란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500년된 마을로 추산 된다.
밀월(蜜月)마을 : 이 마을은 신장 마을에서 사거리 쪽으로 있으며 6.25전란 후 미군 주둔지 앞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무성한 숲이 사거리 쪽으로 우거져 달이 뜨면 그 경관이 수려하여 밀월이라 하였다 전한다. 또한 일설에는 빽빽한 밀(密)을 써서 밀월이라 했다 하는데 이는 가가호호 빽빽이 들어차 번성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다. 그러나 정확한 유래는 찾기 힘들다.
방혜동(方惠洞)마을 : 방혜동 마을은 조선시대에 여방면 방효리(方孝里)로 명기되어 있고 통상 방 여울이라 불렀는데 명칭상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연원은 다른 마을(도원동 하리)로 보아 약4-5 백년 정도 추정되며 방효리가 방혜동으로 변한 것은 일정치하를 견디는 동안 방 여울에서 방여가 방혜로 울이 동을 뜻하므로 일정 시 타지역의 지명도 그들의 마음대로 개편한 것이 한자로 표기함에 방혜동으로 한 것이라 추정된다.
번성(蕃盛)마을 : 1910년경 일제 시대에 풍양 조씨가 정착하여 들을 개간하고 살기 시작한 후에 점차적으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생겼다하며 마을 옆으로 물방앗 간이 있었는데 이곳을 개간한 조씨가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집터가 되어 있다.
마을을 이룬 후 크게 번창하길 바라면서 한자로 번성이라 하였다. 개척자인 조씨의 후손들은 지금도 마을에 4-5호 �고 있으며 주변으로 퍼져 나가 있다.
복창(福昌) 마을 : 6.25 전란 때에 송탄면에 미군이 상주하게 되고 피난민들 모여들어 야산이었던 이곳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니 당시 면에서 복이 가득하고 창궐이라 하여 복장이라 칭하였는데 일설로는 복창이라는 회사가 있어 그대로 마을을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사거리마을 : 6.25 전란 시 황해도 피난민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사방으로 나뉘어진 길가에 집을 짓고 살아서 사거리라 불렀다.
상가재(上佳才)마을 : 가재 마을에서 위에 있어 상 가재라 하며 가재란 명칭의 유래는 마을의 부락산 줄기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여 산세가 예부터 가재(민물어류)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의 연원은 주민들의 대부분이 광주 이씨로 보아 이들의 정착이 400여 년쯤으로 조선 중기 때 형성 된 것으로 보아진다.
[문화 유적:독립투사 이승익 묘, 풍년나무 전설]
상리(上里)마을 : 내리와 같이 윗동내라하여 상리라 하였으며 사창리(司倉里), 양성골(陽城), 배나무골, 샛골(間谷), 독치골(감나무골), 안골, 산막골(山 谷), 정골(鼎谷)등으로서 형성된 마을이다.
사창리는 조선 영조 때의 자료(1759)에 보면 여방면 사창리로 불렸고 인구 90명의 마을로서 앞에 큰 강이 있고 나루터가 있어 주막과 홍등가가 형성되어 사창리라 했다하며 지금도 닻줄을 묶었다는 느티나무가 있다.
정골(鼎谷)은 옛적에 무쇠솥을 만들었던 마을로 솥정(鼎)을 써서 정골 이라 했다는데 최근까지도 흙 속에서 무쇠 조각이 나왔었다고 한다.
[문화 유적:정골 용광로 터, 양세 충효 정문, 이성부 충절정문, 느티나무(800년), 물푸레나무(400년), 향나무(800년), 모과나무(400년), 400년 초가집 1채, 덕암산 산신각]
석정(石井)마을 : 돌로 된 우물이 있어 석정이라 하고 돌우물 고개가 있으며 조선 시대에 인근 마을 중 물맛이 좋은 3대 우물 중 하나였다.
[문회 유적:돌우물]
서정(西井)마을 : 조선시대에 양성현 서쪽 마을로 맛이 뛰어난 우물이 있어 그 우물을 서우물, 서두물, 서둔물이라 하였고 한자로 서정(西井)이라 하였다.
송월(松月)마을 : 신장과 밀월마을 중간에서 남쪽으로 들에 새로 형성 된 마을로 6.25 후에 지명이 생긴 듯 하며 넓은 들과 송림사이의 달을 지칭하여 송월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유래는 추정하기 힘들다.
송천(松泉)마을 : 고거 읍 당시 지산리(芝山里)에 속하였던 이곳은 탄현동에서 1970년경 분리되고 당시 행정기관인 읍에서 송천이라 하였다.
수촌(水村)마을 : 칠원에서 분리된 마을로 앞에 흐르는 통복천이 유일한 농업 용수 및 식수로 사용 할 때에 그의 중요함을 아는 주민들이 水村이라 하였다. 매년 정월 그믐이면 검은 돼지를 잡아 井제사를 통복천과 수로에서 지내면서 마을의 흥성함을 기원하였었다.
신서(新西)마을 : 서정리 일대에서도 서쪽으로 치우친 조선 말기쯤 형성되어 신서라 하였다.
신선(新鮮)마을 : 조선 중기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되며 구 시청 부근으로서, 6.25 이후에 전입된 인구가 많다.
신리(新里)마을 : 이충 마을 앞에 새로 생겼다 하여 신리라 칭하였다.
신장(新場)마을 : 송탄의 번화가로 현대에 흥성하는 마을로서 예전에 통상 지골, 짓골이라 하였으며 짓골은 제역마을의 줄임말(부르기 쉽게 변형 된)이라 추측 된다. 또한 새로이 시장이 형성(6.25 전후) 되면서 시장 즉 시장이라 칭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연원은 정확히 추측하기 어렵고 해방 이후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본다.
신창(新創)마을 : 6.25 전란 시에 황해도 피난민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면서 황해도 촌으로 불리었는데 면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곳이라 하여 신창이라 칭하였다 한다.
신촌(新村)마을 : 원 칠원과 수촌 사이에서 새로이 형성된 부락이라 하여 부르게 되었다. 원 도일(道日)마을 : 이 마을은 칠원에서 장안리 사이에 도이천을 옆으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원도일, 상하 내리와 더불어 조선 때 여방면의 소속으로 여좌울(월)이라 하였다.
이 마을 전체는 아흔 아홉 골짜기로 되어 있어 인근 방여울(방혜동)을 합쳐서 백여골을 만들어 여방면의 형성을 주도하였다 한다. 옛적 삼남 대로변에 위치하여 주막이 형성 되어 감주(甘酒) 거리라 칭 할 정도로 번창 하였다하니 그 연원이 오래된 것으로 보이나, 도원의 어원을 찾기 힘들다.
신흥(新興)마을 : 현 오좌동의 앞산 등성이를 넘어 새로이 부락 새력을 내린 곳으로 송탄면에서 행정 구획상 오좌동 마을에서 분리하여 신흥(새로 흥하는)마을이라 칭했다. 마을의 토성은 오좌동 마을의 수성 최씨 일문 및 전주 이씨이므로 그 연원은 오좌동 마을과 대동 소이한 것 같다.
장안(長安)마을 : 조선시대 삼남 대로에서 흰치고개를 넘어 형성된 마을로서 고려 말의 충신인 운암 차원부 선생을 조상으로 하는 연안 차씨가 토성이고 장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유래는 마을의 안녕을 바라고 연안 차씨가 일찍이 살아 왔기 때문에 장안이라고 한 것 같다.
[문화 유적:운암 차원부 묘, 흰치고개, 이용선 시혜비]
점촌(店村)마을 : 1920년 경 이마을에 황금석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가마를 설치하고 좋은 옹기를 구워 팔면서 점(店) 마을이라 불렀다하며 차후 옹기 굽는 이가 많아져 주변의 옹기를 생산해 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점마을은 점촌이라고 표기했는데, 1970년대 들어 서면서 송탄의 주택지로 변모해 산도 깍이고 옹기 가마도 없어져 지금은 점촌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무색하게 되었다. 하지만 향토민의 가정마다 점촌의 옹기들이 옛 숨결을 전해 느끼게 한다.
[문화 유적:무덤 전설, 충혼탑]
제역(除役)마을 : 이 곳은 현 신장 1동의 대부분의 남산터를 포함하는데 그 기원은 조선 중종 시대의 최수성(원정) 선생의 정착으로 부터이다.
강릉 최씨인 최 선생은 중종 16년에 간신의 모함으로 죽게 되었으나 중종 35년에 누명을 벗게 되었고 인종 1년에 영의정에 추대되고 시호를 문정공이라 하였다. 선조 때에는 이율곡 선생이 공의 묘가 있는 현 남산터(猿山) 부근 30여호에 묘의 수호를 명하고 근방 10리 안에 세금 및 나라의 부역을 면제하였다. 이 때부터 공이 살았던 이곳을 제역이라 하여 최정승을 받들고 기리게 했다.
[문화 유적:최정승 설화]
중앙(中央)마을 : 서정리 일대에서 중앙부에 위치하였다하여 중앙이라 하고 송탄면 당시에 생겼다.
중리(中里)마을 : 방혜동 마을에서 막곡마을 사이에 형성된 마을로 방혜동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6.25 전란 후 행정 구역 개편 시 분리되면서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리라 칭하게 되었다.
좌동(佐洞)마을 : 좌동은 좌울, 좌월(佐月)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지형의 모습이 동반월(東半月), 서반월(西半月)으로 표현됨으로서 선인들이 달月을 써서 좌울이라 했다한다. 이 마을은 제역마을의 원조인 강릉 최씨 문중의 이주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지장(地場)마을 : 지장 부락의 유래는 고려 말기(A.D.1300년 전 후)로 불악산 줄기에 지장사(地場寺)라는 절(현 송탄여중 뒷산 기슭)이 있었고 절 밑으로 부락이 형성되어 통상 지장절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선조 때의 임진왜란으로 절은 소실되고 지장부락은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왔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지장절에서 지장으로 변하여 불리운다.
[문화 유적:마을 사당 1칸]
오리곡마을 : 약3-4백년 전에 이곳의 토성인 단양 우(禹)씨가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로서 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이 골짜기에 5그루의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마을이 생길 때 오류곡(五柳谷)이라 불렀다 하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발음이 어려워 점차 오리곡으로 변한 것이라 추정된다.
일설에는 마을 앞으로 큰 내가 흐르고 그 곳에 많은 오리가 모여들어 오리골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데 그 진위를 알 수 없다. 마을 촌노에 의하면 약 2-30 년전 까지도 구전되는 큰내의 다리(옛적 어떤 노인이 놓았다는)가 마을 앞 논에서 일부 드러내고(폭1m 길이2m쯤) 있었다 하는데 경지 구획으로 어디 쯤인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문화 유적:오리곡 설화, 맹정승 설화]
오좌동(梧佐洞)마을 : 이조 중엽 수성 최씨인 최자반 선생이 낙향하여 개척한 마을로 吾자를 서서 吾佐라 했는데 주변의 산세가 봉이 승천하는 형상이라 하고 봉은 오동나무 열매를 먹고 살기에 마을명을 吾에서 오동나무 梧로 고쳐 쓰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에는 또다른 봉황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마을 앞산 봉우리의 이름을 동실봉(桐實峰)이라 불렀는데 이는 오동나무 열매가 가득 열리는 봉우리를 뜻하며 마을의 형세에 관해서 생긴 명칭이라 하겠다.
[문화 유적:최자반 선생의 설화, 수성군 사당, 은행나무(둘레5.6m, 높이18m), 향나무(둘레1.6m, 높이10m)]
우곡(牛谷)마을 : 이 마을은 예부터 소가 누워있는 형이라 하여 우곡이라 했는데 일설에는 고려 때 이 마을에 진산 소씨가 정승으로 가문을 이루어 살았고 역적으로 몰려 떠나 갔으나 그 당신 소씨가 산다하여 소골이라 했다고도 한다.
[문화 유적:풀무골 전설, 김세한의 묘]
원 도일(道日) : 도일 마을은 원도일, 상하 내리로 구성 되어 있으며 조선 때 여방면 소속으로 여좌울(월)이라 하였다. 마을 전체는 아흔 아홉 골짜기로 되어 있어 인근 방여울(현 방혜동)을 합쳐서 백여골을 만들어 여방면의 형성을 주도 하였다 한다. 도일마을은 옛적 삼남 댜로변에 위치하여 주막이 형성 되었으며 감주(甘酒) 거리라 칭할 정도로 번창하였다고 하나 도일의 어원은 찾기 힘들다.
원장당(原獐堂)마을 : 산의 지세가 노루(獐)형에 산밑의 마을이라 하여 장당이라 하고 본래의 마을이라 하여 원장당이라 하여 조선 중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원 이충(二忠)마을 : 두 명의 충신이 유년기를 보낸 마을이라 하여 이충(二忠)이라 불렀으며 두 명의 충신은 1609년에 출생한 추담 오달제 선생과 1482년에 출생한 정암 조광재 선생으로서 이로 보아 마을의 연원은 약500여 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원자를 쓰는 것은 원래의 이충 마을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지금은 도시 확장으로 10여호만 남아 있는 마을이다.
칠괴(七槐)마을 : 조선 선조 때 청주 한씨 일문이 현재의 동부동 관내인 막곡 마을 앞산의 용담봉 부근에 정착하였으나 당신 삼남대로 상에 있는 주요 도로인 흰치고개에 도둑이 많이 있어서 현 불악산 줄기의 끝 부분인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공동 우물이 예부터 있었는데 그 주변에 7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으며 그 우물과 느티나무의 신령으로 7명의 장사가 태어났다고 하여 칠괴라고 하였다 한다. 현재 7그루의 느티나무는 자연히 소실되고 우물만 남아서 한 가닥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칠원(七院)마을 : 칠원 마을은 수촌, 신촌을 포함하였으나 지금은 원칠원이라 부르는데 그 유래에는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칠원의 예 명칭은 갈원, 갈왕굴이라 하였고 이는 칡(칡 갈葛)이 많아 붙여진 듯 하나 정확한 추적은 어렵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옛적 삼남대로변에 위치한 이 마을은 많은 이의 교통로 이자 쉬어 가는 주막과 파발역이 있어 번화하였고 왕이 각도 순례시 쉬어갔는데, 정확한 왕의 이름은 모르나 왕의 순례 길에 갈원에 들러 하루를 묵게 되었을 때 병이 났고 그 원인이 칡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칠원으로 고쳐 불러라고 해서 그 후 칠원이라 했는데 조선 영조(1759) 때 자료를 보면 여방면 갈원리라 칭하고 인구 120명이라 했으니 조선 말기에 명칭이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업이 발달되었다. 아주 오래 된 마을이다.
[문화 유적:옥관자정, 지명설화]
탄현(炭峴)마을 : 조선시대 말기에 진위현 탄현면으로 하여 상.하.사.오리로 구성 되어 1756년 당시 인구 603명으로 큰 마을이었다. 지금의 탄현마을은 1952년에 독립하여 예 명칭을 지니고 있다.
탄현이란 명칭의 유래는 송탄의 유래에 관련되는데 현재 서탄면 적봉리에 숯을 굽는 가마가 있었고 탄현면은 참나무(숯 재료) 숲이 무성하여 숯 굽는 이가 많이 살면서 궁중에 숯을 납품했다고 한다. 현대에서도 한 때나마 송탄을 일컬어 숯 고개에서 유래된 쑥고개로 불렀으나 이제는 점차 잊혀지는 말이기도 하다.
하가재(下佳才)마을 : 상 가재의 아래쪽 마을로 아래 하(下)를 써 하 가재로 불리우게 되었다.
하리(下里)마을 : 하리마을은 도일마을의 범주안에서 아랫마을로 불렀기에 하리라 했다하며 도일마을이 99골짜기로 구성되어 하리 마을도 골(谷)의 형태나 특징에 따라 명칭이 많아서, 큰여의(如意)실, 작은 여의실, 원당골(院當谷), 대마(待馬)거리등이 있다.
대마거리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마을 산세가 장군의 투구와 같아서 장군이 태어난다 하여 장군이 타실 말이 기다린다하여 대마거리라 하였고, 또 숫돌고개라는 곳도 있어 장군의 칼을 갈 곳이라 하였다 한다.
고려 말에 형성 되고 석씨 이 후 소씨가 살다가 원씨가 도일리 일대에 800여년 살고 있다.
[문화 유절:원균사당, 팽나무(수령400년,둘레5.6m,높이18m), 엄나무(수령 500년)]
지명 이야기
칠원동
1. 삼남대로의 중심마을 원칠원
(사진:원칠원옥관자정)
칠원동은 원칠원, 새말(신촌), 수촌, 쇠물뿌리 마을로 이뤄졌다.
평택시가 통합되기 전에는 이 마을들은 송탄시였다. 그래서 마을 어른들은 지금도 “여기부터가 송탄이여”라며 평택시와 구분하려 한다.
100년 전 만해도 원칠원은 삼남대로와 충청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사람과 물자의 통행이 많았고 마을도 70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1번 국도가 삼남대로를 비켜가면서 교통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상실하였다.
칠원의 본래 이름은 갈원(葛院) 또는 갈왕골이었다. 갈원이나 갈왕골이 한자이면서 칡 갈(葛)자를 쓰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갈원 이전에는 “칡골’ 쯤으로 불렸을 것이다.
원칠원에는 옥관자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옥관자는 조선시대 당상(堂上)의 벼슬아치들이 다는 물건이다. 이 우물이 당상관의 상징인 옥관자를 받게 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시대 인조임금이 남쪽으로 순행(巡行)을 가던 중 갈원(葛院)에서 쉬게 되었는데 갈증이 심하여 관원에게 물을 떠오게 하였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심하게 갈증이 났던 임금은 물맛을 보고는 그 맛에 감탄하여 옥관자를 내렸다는 이야기다.
옥관자를 내렸는지 안 내렸는지 근거는 없지만 이 이야기에는 교통이 요지로서 갈원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갈원(葛院)이 칠원(七院)으로 바뀐 시기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대동여지도와 19세기말에 편찬된 진위현 읍지에도 “갈원(葛院)”으로 기록되고 있어 갑오개혁 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왜 갈원(葛院)이 칠원(七院)이 되었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양에서부터 일곱 번째에 해당되는 역원이어서 칠원(七院)이라고 했다는 말이 가장 설득력 있다.
2. 수촌(水村) – 물방아거리라는 지명이 친근한 마을
수촌마을은 평택-원곡 간 도로를 달리다 농협주유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통복천 작은 다리를 넘으면 있다.
이 마을의 본래 이름은 “물방아거리”다.
방앗간이 없던 시절 물레방아는 발달된 도정(搗精) 시설이어서 상징성이 강했기 때문에 “물방아거리”가 마을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마을노인정에서 만난 이은성(87세) 옹에 따르면 물레방아는 마을회관 자리에 있었는데 통복천 본류가 아니라 마을 옆으로 흐르는 지류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물레방아가 없어진 것은 약 70년 전쯤이다. 짐작하기로는 기계시설을 갖춘 근대적 방앗간이 생기면서인 것 같다.
물방아거리마을의 역사는 통복천과 벌인 한판승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통복천의 물을 식수로 사용했고, 봄이면 보(洑)를 막아 농업용수로 사용했으며, 초여름 장마지면 상습적인 침수로 집이 떠내려가고 사람이 죽는 소동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정작 모내기철에는 물이 부족해서 가뭄에 시달렸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신 앞에 겸손해진다.
물방아거리 사람들은 해마다 섣달 그믐이면 통복천에 정제(井祭=우물제)를 올렸다. 정제는 흠 없는 소머리를 올렸는데, 통복천 큰 내에서도 지냈지만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작은내(똘물)에서도 지냈다고 한다.
3. 새말 – 명창 이동백의 절창이 묻힌 마을
새말은 한자로 신촌(新村)이라고 부르지만, 신촌이나 새말이나 다 같은 말이다.
보통 새말, 새터같은 지명은 기존의 마을이 분동(分洞)되거나 새로 생겼을 때 만들어지는데, 이 마을은 원칠원 마을 옆에 새로 생겼다고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새말은 송만갑, 정창렬과 함께 근대 최고의 명창이었던 이동백(1867-1950)선생이 은퇴 후 말년을 보냈던 마을로 유명하다.
이동백 선생은 충남 서천출신으로 소리를 잘하여 고종황제에게 정3품 통정대부를 제수받은 분으로, 고운 음색과 고음(高音)으로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했고 새타령은 이날치 이후 최고라는 평을 받았다.
마을 노인들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용모를 가졌던 선생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동백 선생이 새말에 정착하게 된 것은 말년에 얻은 부인이 평택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무당으로 선생을 만나기 전 시집을 갔다가 소박맞고 돌아온 뒤 선생을 만났는데 얼굴이 아주 곱고 예뻤다고 한다.
한 마을에 살았고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냈지만 선생은 항상 작은북을 하나만 들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마을에 머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혹 머물 때면 마을 뒤 이산내 산에 올라 노래를 하였다. 마을에는 선생이 산을 오르며 노래를 짓고 올라가서는 북을 치며 노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후손도 없고 제자도 거의 없었던 선생의 말년은 무척 쓸쓸했다고 한다. 죽은 뒤에도 마을 사람들이 장례를 치른 뒤 이산내 산에 묻었는데 돌보는 이가 없어 위치는 알 수 없었다.
– 평택시민신문 2002-05-08 (129 호)
송탄동
‘뒷산 꽃과 같아 마을사람들 복 받을 것’ 스님 예언따라 ‘방혜울’로 일곱 그루 큰 느티나무 정자 있었다는 칠괴정, 진주 소씨 개척마을
1. 막곡 – 본래 마골이라고 불렸던 마을
송탄동은 행정동으로 가재동, 모곡동, 칠괴동, 도일동, 장안동을 안고 있다.
그 중 막곡은 송탄동 동사무소와 송탄초등학교가 소재한 마을이다.
막곡(幕谷)은 “마골” 또는 “뱅여울”이라고도 하고 방혜동과 함께 “방혜울”로도 불린다.
막곡(幕谷)이라는 지명은 마을 뒤 “성재산”이 군막(軍幕)을 친 것과 같아 만들어졌다는 설과, 실제로 옛날 이곳에 군인들이 군막을 쳤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막곡(幕谷)이 형성되기 전 이 마을을 “방혜울” 또는 “뱅여울”로 불렀던 점으로 미루어 군막(軍幕)과는 관련이 적다고 여겨진다.
마을 주민 안영준(68세)씨는, 마을 사람들은 20, 30년 전까지만 해도 “뱅여울”로 불렀는데 행정관청에서 “막곡”으로 부르면서 그대로 굳어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18년에 편찬된 조선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도 “막곡(幕谷)”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사실과 틀린 주장으로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마골”이라는 지명이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화 하면서 “막곡”으로 쓰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막곡마을에서 모곡마을로 돌아가는 산모퉁이를 “마골모퉁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막곡과 방혜동 사이에는 한자로 중리(中里)라고 쓰는 중간말이 있다.
이 마을은 막곡과 한 마을이었다가 1950년대에 분동(分洞)되었다.
막곡에서 가재울로 넘어가는 고개를 “성재(성고개)”라고 부른다. 성재는 막곡에서 가재울을 지나 서정동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보통 “성(城)”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성곽”과 관련 있는데, 성재 좌우로 도일천과 장안천이 흐르고 산맥이 부락산과 연결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남쪽으로 영신현, 북쪽으로 송장부곡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산성(山城)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막곡과 중간말은 2백여 년 전 풍양 조씨가 개척하였는데 나중에 수성 최씨가 들어와서 대성(大姓)을 이루었다. 평택지방의 수성 최씨는 최경을 입향조로 안양공파와 가산공파로 나뉜다. 그 가운데 막곡의 수성 최씨는 가산공파이다.
2. 방혜동 – 경주 이씨가 이룬 마을
방혜동은 방혜울, 방회울, 방여울이라고 부르는 마을로 경주 이씨의 동족마을이다.
이 마을은 오제공 이탕이 개척하여 4백년 이상을 살아왔는데, 이탕의 차남 이정암이 임진왜란 때 큰 공(功)을 세워 선무 2등 공신에 오르면서 높임을 받아 영화를 누렸던 집안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 평택의 향촌사회에서는 명문사족으로 상당한 위세가 있었다.
방혜울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어떤 스님이 마을을 지나다가 “뒷산이 꽃과 같아 마을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기 때문에 불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명과 관련된 설화나 전설은 기존의 지명이나 사족(士族)들이 만든 지명을 설명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인 경우가 많다.
그보다는 옛날 마을을 휘감아 돌았던 도일천의 지류가 마을 앞에서 여울목을 형성했기 때문에 “울돌목”쯤으로 불렸는데 나중에 “방회동” 또는 “방혜울”로 한자화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방혜동과 막곡 사이에는 사당재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10여 호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사당재라는 지명은 방혜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오제공 이탕의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시기 막곡과 방혜동에서는 좌우이념대립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특히 근대교육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던 막곡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이 곳에 묻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사당재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돼지우리로 변했다.
3. 가재울과 칠괴동
가재동이라고 부르는 가재울은 성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상가재, 하가재, 감나무골로 이뤄졌다.
“가재”라는 지명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가재산의 모양이 가재와 같다고 해서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기 이전에 산이나 하천의 이름이 먼저 만들어지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신빙성 있다.
가재울의 대성(大姓)은 광주 이씨와 수성 최씨이다.
광주 이씨는 350여 년 전 상가재에 먼저 마을을 이루었는데 나중에 분동(分洞)되면서 하가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가재 마을에 수성 최씨들이 입향한 시기는 광주 이씨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아마 막곡마을의 입향 시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가재 마을 아래에는 감나무골이라는 자그만 마을이 하나 더 있었다.
마을에 감나무가 무성했다는 마을인데 지금은 모두 이주하고 사라졌다.
칠괴동은 칠괴정, 또는 칠구쟁이로 불리는 마을이다.
이 마을 안에는 일곱 그루의 큰 느티나무 정자가 있어서 “칠구쟁이” 또는 “칠괴정”이라고 불렸다. 지금 마을에는 느티나무는 없고 오래된 버드나무 몇 그루가 마을 앞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을 개척한 사람들은 진주 소씨였다. 그러다가 청주 한씨가 소씨 집안에 장가들어 정착하면서 소씨는 쇠하고 한씨는 번성하였다.
평택에는 우곡이나 도일동처럼 소씨가 터를 잡은 곳에 다른 성씨들이 대성(大姓)을 이루고 동족마을을 형성한 마을들이 많은 데 칠괴동도 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평택시민신문 2002-05-16 (130 호)
도일동
1. 덕암산
아흔 아홉 구비에 자리한 마을들 도일동은 덕암산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양성의 천덕산, 백암산, 부락산과 함께 평택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덕암산(해발 164.5m)은 도일동에 수많은 골짜기를 만들어냈다.
도일동 사람들은 덕암산에 아흔 아홉 골짜기가 있으며 골짜기마다 아흔 아홉 개의 마을이 있다고 말한다.
언뜻 떠오르는 큰 마을만도 상리, 사창이, 내리(안말), 하리, 원도일이 있고, 골짜기마다 10여 호 남짓 자리한 작은 마을만도 샛골, 배나무골, 독치골, 원당골, 운터말, 암말, 갓골, 능골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일동은 크게 “도일(道日)”과 “여좌울(예제울)”로 나뉜다.
도일(道日)은 원도일 마을 말하는데 “퇴일” 또는 “퇴울”로도 불린다.
도일 또는 퇴일이라는 지명에는 “산 뒤쪽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경북 영천군의 경우처럼 도일마을도 갈원(칠원)의 북쪽 산골짜기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 것 같다.
덕암산 남쪽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들을 합하여 “여좌울”이라고 부른다.
속설에는 옛날 문월(文月)마을(어디인지는 모름)에는 밀월, 좌월, 남월, 오좌월, 가재월, 벼좌월, 여좌월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마을이 여좌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송탄지역에는 송북동의 오좌동(울), 신장동의 밀월동, 좌동(좌울), 송탄동의 가재동(가재울)과 같은 마을이 있어 제법 그럴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동면, 서면, 남면, 북면처럼 행정적인 편의에 따라 이름을 정한 것이 아니라면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보다는 원도일 마을 소진형(80세) 옹의 주장처럼, 처음에는 각기 마을 이름대로 불렀는데 일제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크고 작은 주변마을을 “도일리”로 묶게되자, 도일과 옛 진위군 여방면 지역을 구별하기 위하여 “여좌울”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다.
2.원도일 – 도일동이라는 지명의 원산지
도일동이라는 지명은 원도일 마을에서 왔다. 도일동에는 전통 있고 큰 마을들인 상리, 내리, 하리가 있는데도 도일(道日)이라는 이름이 행정구역 명(銘)으로 정해졌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 마을 출신의 지역유지가 개입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원도일 마을의 역사는 2백여 년에 불과하다.
그 전에는 원도일과 장안동 중간에 샛둘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원도일 마을 부근에는 삼짓말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두 마을 사람들이 이 곳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모두 30여 호쯤 되는 마을이지만 처음에는 다섯 집이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을 이룬 사람들은 진주 소씨, 연안 이씨였다. 가까운 여좌울이나 칠괴동, 소골처럼 원도일 마을도 소씨들이 개척한 마을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소진형(80세) 옹은 도일동 일대에 소씨마을이 많은 것은 이곳이 고려 때 진주 소씨의 사패지(賜牌地=임금에게 하사 받은 땅)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에 본래 송장부곡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주목되는 사실이다.
원도일 마을 입구에는 큰 참나무가 한 그루 있다. 최근에는 마을 노인들의 쉼터구실을 하는 나무이다.
소진형 옹은 자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큰 고목이었다며 아마 수 백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나무 좌우에는 작은 봉우리가 있다. 왼쪽 봉우리가 철마산 오른쪽이 두루봉이다. 두루봉은 노적봉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사람들이 이곳에 벼 낫가리를 쌓아두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도일동 일대에 투구봉, 대마거리와 같은 군사적 지명들이 많은 점과 주변마을에 원주 원씨나 진주 소씨와 같은 무인집안이 세거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군마(軍馬)와 관련된 지명일 가능성도 있다.
원도일 마을 앞에는 도일천이 흐른다.
소화 14년(1941년) 일제가 원곡에서 서정동 간 신작로를 건설하기 전 이 곳에는 돌다리가 있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마을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마을머슴”이 있었다. 이곳에도 학교 가는 아이들을 업어서 건너 주는 머슴이 있었는데 이 분은 집도 절도 없는 고아였다가 마을에 정착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리가 놓이면서 생업수단이 없어진 이 사람은 한동안 고생했지만 그 후 자수성가하여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
1941년 일제가 만주에서 가져온 콩깻묵을 배급 주고 건설했다는 원곡 서정리 간 340 지방도는 60년만에 도로확장공사가 한창이다. 돌다리가 있었던 자리에도 새로 큰 다리가 놓이고 있다. 발전이라는 이름에는 항상 아름다운 수식어가 붙어 다니지만 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업어 건너 주고 목숨을 연명했던 마을머슴의 애환과 끝없는 절망을 기억이나 할는지 모르겠다.
3.석씨 천년, 소씨 천년, 원씨가 천년을 사는 마을
도일동 여좌울의 상리, 내리, 하리 마을은 덕암산 아흔아홉구비에 자리한 마을들이다.
처음 이곳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석씨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씨가 들어와 살았고, 조선 중기에는 원주 원씨가 들어와 동족마을을 이루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석씨 천년, 소씨 천년, 원씨 천년” 마을이라고 말한다.
원주 원씨는 진주 소씨와 처족(妻族)관계를 배경으로 입향(入鄕)하였다. 예컨대 입향조였던 원몽이 소을동의 사위로 재산상속을 받자, 상속재산이 있는 도일동으로 이주한 것이다. 요즘 사람들 생각으로는 조선시대에 처가의 재산상속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고산 윤선도 집안이나 퇴계 이황 집안처럼 조선 전기만 해도 처가 재산으로 부자된 사람들이 많았다. 원몽은 상리 샛골(간곡)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 자리잡았다.
관행처럼 처가의 상속재산이 있는 마을로 이주하였지만 진주 소씨의 텃세 때문에 정착이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원몽 이후 원연, 원균, 원사립 등 많은 후손들이 무과에 급제하고, 원균과 같은 공신(功臣)을 배출하면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특히 조선후기 이앙법이 발달하고 농경지의 저지대 확산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논농사 지역인 하리마을 쪽으로 마을을 확장한 결과 원주 원씨는 덕암산 아흔 아홉구비마다 마을을 이룰 수 있었다.
운터말에 사는 이상희씨(73세)는 50여 년 전만 해도 상리, 내리, 하리 2백여 호가 대부분 원씨였고, 항렬에 따른 위계질서가 엄중했으며, 도일동 주변 산야가 원씨 종산(宗山)이었을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단했던 위세도 많이 줄어 전체 250여 호에서 원주 원씨는 100여 호에 불과하고 2/3쯤은 타성들이라고 하였다.
4.아흔아홉구비에 새겨진 이름들
뒤로 덕암산, 앞으로 도일천을 두고 형성된 여좌울에서 큰 마을은 상리, 내리, 하리이다.
세 마을 가운데 가장 위쪽에 위치하였고, 처음 생긴 마을은 상리(上里)이다.
상리에서 가장 큰 마을은 사창(司倉)이다.
사창(司倉)은 조선시대 고을의 세곡(稅穀)을 모아두던 창고를 말하는데, 사창이 마을에는 진위현의 사창이 있었다. 사창에 모아진 세곡은 보통 배로 실어 나르기 때문에 창(倉) 부근에는 나루(뱃터)가 있기 마련이다. 사창이 마을 동쪽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곳이 뱃터였다.
마을 노인들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뱃터가 있었으며 도일천을 따라 올라온 배들을 느티나무에 메어두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였다.
뱃터는 지금 서너 집이 남아있고 음도 변하여 “배낭골”로 부른다.
도일천의 수량이 제법 많았던 시절 냇가에는 가물치, 장어, 가재가 살았고 풍부한 먹이를 찾아 황새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황새가 날아든 냇가에 서너 집이 찾아들어 마을을 이루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형성된 마을은 십중팔구 “황새울”이나 “황새말”이다.
도일동의 황새말은 버스정류장이 있는 마을이다. 황새말에서 좁은 아스팔트길을 따라 오르면 샛골과 안골, 정골이 있다.
샛골은 한자로 간곡(間谷)이라고도 하며 원주 원씨의 입향조 원몽이 처음 자리잡은 마을이다. 걸어서 마을을 한바퀴 도는데 5분이 채 안 걸릴 정도로 작은 마을인 샛골에는 마을 제당으로 쓰이던 산신당이 있다.
샛골처럼 안골도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덕암산 줄기를 잘 받치고 자리해서 지리산 피아골의 직전마을처럼 산 냄새, 흙 냄새, 사람 냄새가 향기롭다.
안골 입구에는 양세충효정문이라는 정려(旌閭)가 있다.
정려(旌閭)의 주인공은 조선 중기의 무인이었던 원연(1543-1594)과 아들 원사립(1569-1610)이며, 19세기 인물인 원길상의 정문도 함께 모셔져있다.
양세(兩世)라는 이름의 정문이지만 따지고 보면 삼세(三世)인 셈이다.
안골을 지나 덕암산 정상부로 올라가면 풀무골로도 불리는 정골이다.
정골에는 이괄의 난과 관련된 제철유적이 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원씨 가문의 원만주라는 사람이 난(亂)에 호응하기 위하여 제련시설을 마련하고 농기구를 만들어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병장기를 제조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는데 난이 실패하면서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제철흔적이 남아있고 파묘(破墓)된 자리에는 상석과 문인석 등이 흩어져 있다.
사창이 마을 위쪽으로 오르면 요골이 있고, 위로는 큰 오리골과 작은 오리골이 있다.
요(窯)골은 옹기굽던 마을이다.
옹기굽던 마을은 점촌(수공업자 마을), 골점골, 사기점골 등으로 불리는데 요(窯)골도 같은 의미다.
오리골은 비교적 흔한 지명인데 오리가 많아서 불려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특정 지명에서 5리쯤 떨어진 마을을 의미할 때가 많다. 큰오리골과 작은 오리골로 나뉜 것은 큰오리골이 발전하면서 분동(分洞)되었기 때문이다.
5.덕암산 깊은 골에 자리한 내리마을
우리나라 지명은 몇 차례에 큰 변화를 겪었다.
지명개편이 처음 이뤄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이지만 작은 마을단위까지 통폐합하고 모든 지명을 한자화 한 것은 일제강점기다.
특히 1914년의 지명개편은 자연지명의 한자화와 함께 어려운 한자 지명를 쉬운 글자로 바꾸는 작업을 병행하였기 때문에 상당수의 자연지명은 본래의 뜻이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과 일제잔재 청산없이 수립된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에서도 이와 같은 관행은 바뀌지 않았다.
해방 후의 관료들은 일제가 했던 방식 그대로 주변 지명을 통폐합하고 역사성과 문화성이 결여된 지명을 갖다 붙였다. 결과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민중들의 정서가 담긴 지명들이 뜻이 왜곡되었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바뀌었고 상당 수 지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일동의 상리(上里), 내리(內里), 하리(下里)와 같은 지명도 근대 이후 만들어진 것들이다.
대부분의 마을들은 지명이 개편되면 기존의 자연지명까지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만은 큰 지명만 바뀌고 작은 자연지명은 살아남는 행운을 얻었다. 그것은 덕암산 수호신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골짜기 구비구비마다 워낙 많은 마을들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내리(內里)는 여좌울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원균장군 묘와 내리저수지를 중심으로 석비, 운터말, 새말, 깊은골, 갓골, 능골, 암말, 오리골, 등치골과 같은 마을과 계곡으로 형성되었다.
초입의 석비(石碑) 마을은 7, 8호의 작은 규모로 마을 앞에 원주 원씨 세거비(世居碑)가 있다. 몇 년 전에 건립된 원주 원씨 제각(막선재) 뒤에 형성된 “운터말”은 유래가 정확하지 않지만 본래 “원터말”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원터말”이 맞다면 원씨들이 내리에 처음 자리잡은 곳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는 운터정이라는 우물이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아 주변에서 유명했다.
깊은골은 몇 호 안 되는 작은 마을로 골짜기에 형성되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이 마을에는 원주 원씨 선영(先塋)과 원균장군 생가 터였던 울음밭이 있다.
능골은 원균장군 묘 뒤에 형성된 마을이다. 조선시대 공신(功臣)의 묘는 가까운 마을에 역(役)을 면제하고 관리하도록 조처했는데 이 마을이 그 역(役)을 담당하였다.
갓골은 원균장군 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모양이 갓과 같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안말은 덕암산 쪽으로 가장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저수지 쪽에서 바라보면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매우 포근한 느낌을 준다.
오리골은 암말 서쪽 등성이 너머 계곡을 말하고 등성이를 하나 더 넘으면 등치골이다.
등치는 산등성이가 삐쭉 나온 것을 말하는데, 실제 계곡의 위치가 산 등치에 해당되는 곳에 있다.
새말은 가장 큰 마을로 안말, 깊은골과 함께 내리의 중심마을이었다.
6.여의주 안에 형성된 하리마을
하리는 모두 80여 호가 모여 사는 큰 마을로 큰여의실과 작은여의실, 원당골같은 마을과 삼남대로를 중심으로 주막거리, 서낭댕이, 왕 뒤, 개천거리, 대마거리, 투구봉, 숫돌고개가 있다.
여의실은 진위군 여방면 시절에는 여동(如洞)과 의곡(意谷)으로 나누어 불렀지만 본래는 한 마을이다.
큰 여의실은 앞쪽에 나앉은 마을이고 작은 여의실은 원균장군 사당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한 눈에 여의주를 연상시킬 만큼 모양이 포실한데, 뒤로 덕암산이 받치고 있어 안정감을 더해준다.
원당골은 진위군 시절 양성군 원당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당(堂)골이라는 지명이 다 그렇듯이 본래 당집이 자리했던 마을이다.
주막거리는 지난 해에 개통된 삼남대로 초입에 있다. 이 곳 주막은 술맛이 기가 막혀 “감주거리”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거리 상으로 흰치고개를 너머 온 길손이 다리 쉼을 할만한 위치에 있어 땀 깨나 흘리며 험한 산길을 넘어온 뒤 마시는 탁배기 한 잔이 목젖을 자극했을 법하다.
안골에 사는 원유수 옹(75세)은 해방 전까지 주막이 한 집 있어서 노름께나 한다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는데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고 전한다.
주막 옆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지금은 삼남대로가 갈라지는 삼거리에 수 백 년 된 엄나무 한 그루만 덜렁 서 있는 그 자리다.
성황당 자리는 사투리로 “서낭댕이”라고 부른다. 내 고향에도 서낭댕이가 있는데, 성황당이라고 부를 때보다 어감이 부드럽고 뒷맛이 좋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성황당에서는 무당들이 당제(堂祭)를 지냈고, 엄나무는 성황목으로서 길손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며 신령한 존재로 대우받았지만 이제는 신(神)도 떠난 그 자리에 홀로 남아 옛 추억을 더듬게 한다.
개천거리는 도일천 지류가 흐르는 개천가여서 불리게 되었지만 “왕뒤”라는 지명유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짐작할 때 “왕재”라는 고개 뒤쪽이어서 그렇게 불렸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대마거리는 흰치고개 못미처에 있다. 일설에는 원균장군이 이곳에서 말을 기다렸다고 전해지는데, 그보다는 삼남대로 변 고개 아래에 위치했기 때문에 “말을 빌려 타는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투구봉이나 숫돌고개는 원주 원씨 가문이 무인집안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지명이다. 전라도 장성에 가면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는 필암서원이 있는데, “필암(筆岩=붓바위)”이라는 지명에는 공부하는 학자냄새가 폴폴 난다. 이와 같이 투구봉에도 무인냄새가 진하게 난다. 그래서 역사는 속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 평택시민신문 2002-06-19 (133~135 호)
이충동
◁동령마을 고개마루 성황목
■두 충신의 흔적이 서린 마을
이충동은 이충동현대아파트, 건영아파트, 경문대학 등으로 잘 알려진 마을이다.
하지만 이 지역이 개발되기 전에는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비가 있는 마을로 더 알려졌었다.
이충동(二忠洞)이라는 지명도 “두 충신(忠臣)의 유허가 있는 마을”에서 왔다.
지금은 충의각(忠義閣)이라고 불리는 이 비각은 본래 왕명에 의해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예컨대 왕이(순조임금으로 추정) 삼남대로를 따라 남행하다가 칠원동 갈원(葛院)에서 다리쉼을 하면서 이 지역에 명현(名賢)을 천거하라고 하자 신하들이 주변에 조광조 선생의 유허가 있음을 고했다. 왕은 명을 내려 유허비를 세우도록 하고 그 뜻을 기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택시에서 편찬한 다른 기록들은 왕명이 아니라 진위유림들이 주동했다고 하면서, 조광조 선생의 유허비를 달구지에 싣고 가던 중 동령 성재부근에서 말이 움직이지 않자 이유를 알아보니 주변에 오달제 선생의 옛 집터가 있어서 함께 비문에 새겨 건립했다는 설화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동령마을 노인회장 박희복(76세) 옹이나 다른 마을 사람들은 본래 추천된 인물은 조광조 선생이 아니라 오달제 선생이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오학사 비(碑)”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위의 세 가지 주장 중에서 어느 것을 사실로 믿어야 할까. 나는 마을 사람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국가나 지배층과는 달리 민중들의 구전이라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감되는 측면은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의 주장을 토대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본래 지역 유림들이 오달제 선생의 생가 터에 유허비를 세우려고 하자 한 쪽에서 조광조 선생의 유허도 있으니 함께 세우자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양자간 합의로 비(碑)를 세웠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달제 선생보다 지명도가 높은 조광조선생이 더 추앙을 받게되었고 나중에는 건립 과정까지 왜곡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두 분의 유허비는 이충동(二忠洞= 두 충신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듬뿍 담긴 지명을 만들어냈다.
■정제(井祭)와 줄다리기로 풍년을 기원하고
이충동은 부락산(또는 불락산)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원이충, 동령, 석정, 신리, 광말과 같은 자연마을이 있다.
이 지역은 조선 초까지 송장부곡 또는 송장현이었고, 15세기 진위현에 편입되고 조선 후기 면, 리제가 실시되면서 송장면으로 편재되었던 곳이다.
원이충 마을은 건영, 미주, 부영아파트 단지 한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지명으로 볼 때 조광조 선생과 오달재 선생의 집터가 이 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석정은 “돌우물”이라는 지명으로 잘 알려졌다. 원곡 송탄 간 340번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송탄고등학교 못미처 돌우물 가든과 빠리지엔느 산후조리원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석정마을에는 칠원의 옥관자정, 신장동 제역마을의 박우물과 함께 송탄지역의 3대 우물이었던 “돌우물”이 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물은 마을 형성에 아주 중요한 요소였고, 좋은 우물이 있는 곳에는 우물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돌우물”도 그 중 하나이다.
신리와 광말은 20여 호의 규모에 개척된지 6, 70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게다가 주변지역이 개발되고 340번 지방도가 마을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모양이 후줄근하다.
신리는 “새말” “신대”와 같은 지명으로 새로 생긴 마을을 뜻하고, 광말은 들판에 자리잡은 마을을 의미한다.
이충동에서 마을다운 마을은 동령(東嶺)이다.
부락산을 중심 축으로 성재와 작은 흰치재가 살포시 감싸 안은 자리에 위치한 이 마을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는 미덕을 지녔다.
동령은 옛 송장현(부곡)의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동령마을 성터가 마을을 감싸 안았던 것으로 판단되는 곳이다. 성터가 있었음은 미주아파트 남쪽의 성물백이(성문 밖)라는 지명과 성재(성고개)라는 고개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지금도 성물백이에서는 밭을 갈면 기와조각과 주초석 등이 출토되어 성곽과 함께 관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의 성곽에는 옛날에 군대가 주둔했다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치소(治所)와 관계된 읍성(邑城)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성물백이와 마을 사이의 작은 골짜기는 암탉골이다. 이 곳에는 진주 소씨들의 선영(先塋)이 있어 도일동, 칠괴동, 소골과 함께 이 지역의 명문가였을 진주 소씨의 흔적을 보여준다.
마을 동쪽 장안동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성황고개라고 한다. 고개 정상에는 몇 백년 된 느티나무가 그보다 작은 참나무를 감싸안고 있다. 옛날에는 이 곳에 성황당이 있었고 느티나무는 성황목이었다. 성황목은 신령스러워서 가지를 자르면 동티가 나서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령마을 하면 정월 초순 용날에 거행되는 용왕제(우물제=정제)와 줄다리기로 유명하다. 줄다리기는 새끼를 암, 수로 꼬아서 암줄은 여자와 아이들이 잡고 숫 줄은 남자들이 잡았다. 놀이는 반드시 여자가 이기도록 했는데, 여자는 풍요와 생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은 반드시 마을 앞 아카시아 나무숲에 버렸다. 그래야만 풍년이 든다는 것이었는데, 세월 탓인가 이제는 아카시아 나무도 다 베어져 몇 그루 안 남았다.
-평택시민신문 2002-06-26 (136 호)
장안동
◁장안동 전경
■옛날에 장(場)이 섰던 마을이라서 장안동
행정구역으로 송탄동에 속한 장안동은 부락산 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 주변은 인근의 서정동, 이충동과 함께 10여 년 전부터 신시가지로 개발되고 있어 변화가 많다.
마을 뒤로는 몇 년 전 경문대학과 은혜여자 중, 고등학교가 들어섰고, 동쪽으로는 올해에 한국재활복지대학이 개교하였다.
평택지방에서는 한 마을에 중학교 하나, 고등학교 하나, 대학교 두 개가 들어선 메이저 교육타운이 된 셈이다.
얼마 후 동령마을과 경계를 이룬 성재부근까지 아파트가 들어서면 그나마 남아있던 마을모양도 변하고 지명마저 경문대 입구, 은혜여종고 사거리, 무슨무슨 아파트 삼거리 등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떠나고 마을의 옛 모습과 지명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조선시대 장안동은 지리적 요충에 위치하였다.
마을 동쪽으로는 소백치(작은 흰치고개) 너머 삼남대로와 이어졌고, 양성현에서 원곡 가천역을 지나 포승면 원정리 괘태곶까지 가는 길이 장안동과 동령을 지나 장당동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으로 조선 말기 장안동에는 장(場)이 섰다.
송탄시사에 의하면 130여 년 전까지는 장이 섰던 거리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경부선 철도가 건설된 후 형성된 서정장만 기억할 뿐 이곳에 장(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장안동은 연안 차씨들이 대성(大姓)을 이룬 마을이다.
연원은 고려말 간의대부를 지냈던 문절공 차원부다.
이 분은 조선왕조 건국에 반대하여 끝까지 출사를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 처음부터 차씨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차씨 집안보다 광주 이씨나 파평 윤씨 집안이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일제 말 거듭된 흉년으로 마을사람들이 굶주리자 이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비를 털어 도로확장공사와 같은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선행으로 칭송을 받았던 이익래씨나 이용손씨와 같은 광주 이씨 집안 사람들이 마을을 대표했다.
특히 이용손씨의 선행은 마을 사람들에게 깊이 추앙되고 있어 생전인 1940년에 마을 안에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으로 비신(碑身)이 크게 파손되자 얼마 전 마을 사람들의 발의로 송탄고등학교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고개아래에 다시 복원되었다
■말발굽이 찍혀 역마바위, 빈대가 많아서 빈대바위
민중은 난세에 변혁을 꿈꾸고 영웅을 기다린다.
이들이 꿈꾸는 영웅은 굴곡지게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펴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웅은 반역을 꿈꾸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의로운 도적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19세기 초 홍경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서북지방에서 “아직도 홍경래가 살아 있다느니” “그가 하늘의 군사를 끌고 다시 내려온다”는 등의 루머가 나돌았던 것은 민중들의 염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17세기 중엽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에 평택지방에서 이괄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련의 무리들이 호응을 준비했다던가, 수많은 전설을 남긴 것도 같은 경우다.
민중들은 영웅이 보통사람과 다른 신비한 능력을 한 가지쯤 갖고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산맥의 정기와 풍수지리의 힘을 빌려 자신들이 만든 영웅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장안동 부락산 줄기 중봉 기슭의 “역마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평택지방에 나타나는 영웅설화 가운데 하나이다. 진위천을 경계로 서부지역이 임경업 장군 설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면 동부지역은 이괄에 관한 설화가 많은 편인데, 이 이야기도 그와 연관된 것이다.
역마바위에는 말발굽에 깊이 패인 자국이 있다.
사람들은 이 자국이 부락산 정기를 받고 태어난 어떤 장군이 말을 달리다가 부락산에서 중봉으로 뛰어내려 패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부락산에서 중봉으로 뛰어내리는 것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 너무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쯤은 되어야 민중을 도탄에서 구하는 영웅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장안동 뒤 소골봉 기슭에 대수골이라는 계곡이 있다.
이 계곡에 빈대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5백여 년 전 절이 있었고 스님 한 분이 기거하였는데, 이 사람은 염불보다 젯밥에 눈먼 사람이었다. 보다 못한 부처님은 스님을 훈계하기 위하여 바위 뒤에서 빈대가 나오게 하여 스님을 괴롭혔으나 스님은 깨닫지 못하고 결국 파계하고 말았다.
현덕면 신왕리사지처럼 조선시대 절이 폐사되는 과정에서 빈대가 등장하는 것은 흔한 경우이다. 이야기의 구성으로 볼 때 실제 파계승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불교가 억압받던 시절에 폐사된 절에 관한 구전설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절이 폐사된 뒤에도 바위는 영험하게 섬겨졌으며 바위 옆 나무는 서낭목이 되었다. 바위를 지나 소골봉 정상에 오르면 무속인들이 쌓았다는 돌탑이 있다. `
이 곳은 소골 사람들과 장안동 사람들이 매년 추석에 모여 씨름이나 달맞이놀이를 했던 장소이다. 부락산 줄기에 자리한 마을들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
-평택시민신문 2002-07-04 (137 호)
장당동
‘노루댕이’가 장당동으로… ‘뒷산이 노루 형상’은 근거 희박
광천마을 엄나무터▷
1. 노루댕이가 장당동으로 중앙동에는
서정동, 이충동, 장당동 같은 법정동이 있다.
이 가운데 장당동은 서정동, 고덕면 율북리 등과 함께 조선시대 양성현 땅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진위군에 편입되었고, 1938년 군(郡) 명칭이 바뀌면서 평택군으로, 1980년대 평택군에서 평택시와 송탄시가 분리될 때는 송탄시에 속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1번 국도를 중심으로 서쪽에 효명종합고등학교와 대성병원, 장당공단이 자라잡고 있어 오가며 쉽게 식별이 가능하다.
장당동에는 경부선 철길과 서정천, 도일천을 사이에 두고 광천, 장좌울, 노루댕이, 방아다리마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 가운데 장당동이라는 이름은 노루댕이에서 왔다. 그래서 노루댕이 마을을 “원장당”이라고도 하는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한자화 하면서 노루 장(獐) 자에 “댕이”와 비슷한 음인 “당(堂)”자를 붙이면서 장당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그러면 마을이름이 왜 노루댕이였을까?
송탄시사에는 마을 뒷산의 모양이 노루형상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근거가 희박하다.
땅이름 연구가인 배우리 씨는 “노루”라는 이름의 본디말이 “넓은”으로 지역에 따라 “너븐” “노루” “널”로 불려진다고 주장하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노루댕이는 “두집메”라고 불렸다.
“메”는 마을의 다른 이름으로 본래 이 마을에 광주 김씨 두 집만 살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 농장들이 들어오고 6.25전쟁 후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마을 규모가 20여 호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성씨들도 죄다 각성받이고 오래된 토박이가 적다.
방아다리는 효명종합고등학교 옆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도 몇 집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6.25전쟁 후 규모가 커졌다.
“방아다리”는 하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에서 흔히 발견되는 지명이다.
평택지방만 해도 칠원동 수촌마을의 본래이름이 “방아거리”였고, 죽백동에도 “방아다리”라는 마을이 있다. “방아다리”라는 지명은 대부분 물레방아가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이 마을 옆에도 서정천이 흐르고 있어서 옛날에는 물방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노루댕이에서 광천마을 사이에는 좀은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놓여졌다.
노루댕이에서 만난 60대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이 길이 서울 가는 1번 국도였다고 말했다.
처음 듣는 내용이어서 좀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더니 자기도 20년 전에 이사와서 사람들에게 들었을 뿐 자세히는 모른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장좌울”이다.
장좌울은 마을의 규모나 지형으로 봐서는 노루댕이보다 먼저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사가 짧은 마을이다.
이 지명은 좌울이라는 말이 도일동의 여좌울, 가재동의 가좌울처럼 “좌측에 넓게 자리잡은 마을”을 뜻하기 때문에 “장당의 좌측 마을”이라는 뜻에서 불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2.넓은 냇가에 형성되어서 너브내
광천마을은 송탄공단 건너편 광천고가다리 너머에 자리한 마을이다.
“광천”은 우리말로 “너부내”인데, “너브”는 “넓은”에서 변형된 음이다.
이 마을은 장당동의 4개 마을 중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1918년 일제가 편찬한 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도 장당리(노루댕이)와 함께 독립된 이름으로 나온다. 너브내는 “띄우지”라고 불렸던 모곡리와 여염리 성머리마을 그리고 서정동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상에 위치했으며, 마을 앞으로는 서정천과 도일천이 지났다.
1970년대 아산만 방조제 건설이 있기 전만 해도 서정천은 하천 변 배우습지가 매우 넓어서 만조(滿潮)가 되면 “넓은 내”를 이루었다. 넓은 내는 마을 이름도 만들어주었고 조개라든가 자잘한 해산물을 수확하는 기쁨도 주었지만 수해와 염해를 가져다주는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 아산방조제 건설을 두 손들어 반겼다.
너브내도 장좌울이나 노루댕이처럼 마을의 형성시기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동족마을도 아니며 해방 후 타지 사람들의 이주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초 마을 뒤 도톰안 골에 귀농촌이 형성되면서 외지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도톰안골은 귀농민들이 이주하기 전만 해도 “외집메”로 불렸는데, 마을이 형성된 후 “광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광천의 “광(光)”에 귀농촌의 “귀(歸)” 자를 한 글자씩 차용하여 지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서쪽 성머리 마을 사이에는 한뉴목장이 있다.
마을에서 4대를 살아오고 있다는 서정근씨에게 왜 “한뉴”냐고 했더니 1970년대 한국과 뉴질랜드가 합작으로 만든 목장이어서 그렇다고 했다.
성머리마을에서 한뉴목장을 끼고 너브내를 지나 노루댕이까지 이어지는 작은 능선은 옛 성터이다. 경기도박물관에서 발행한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소개된 방축리 성터가 이것으로 판단되는데, 원형이나 방형과 같은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궁금증을 일으킨다.
마을 입구에는 5백년이 넘는 엄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당집도 없는 마을에서 신령스런 당목(堂木)으로 섬김을 받았다.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쬘 때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으며, 오월 단오에는 그네를 뛰는 놀이공간이었다. 신령한 나무이다 보니 일광천 전설이라는 신비한 전설도 전해주었다.
주민 서정근 씨도 마을에서 엄나무에 그네 매는 것으로는 자신이 최고였다며 자랑스러워하는 나무다.
그런데 20여 년 전부터 마을 당제(堂祭)가 중단되더니 몇 년 전에는 마을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나무 전체가 크게 화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5백년을 버텨온 끈기로 2, 3년을 더 버텼는데 작년에 큰 가지가 부러지면서 무너져 내렸다. 질퍽대는 산길을 걸어 찾아간 나무둥치에는 풀만 무성하고 옆에 잘라놓은 등걸은 피 빛으로 붉다.
어느 누구의 솜씨인지 흔적이 희미한 잉걸 옆에 상석을 마련하고 제를 올린 흔적이 있다. 당목(堂木)은 죽었어도 사람의 마음은 당신(堂神) 곁을 떠나지 못하는가 보다.
– 평택시민신문 기자 2002-07-27 (140 호)
서정동
천주교 박해속 신자들이 일군 옹기점, 점촌엔 옹기가마 안보이고…
송탄출장소 앞▷
■우물도 없는 곳에 우물지명이 있다
서정동과 중앙동, 장당동 지역은 조선시대 양성현 땅이었다.
양성현은 읍내(동항), 반제, 구룡동면, 영통면 외에도 원곡에서 원도일 마을을 거쳐 장안, 서정, 동청, 한산리를 지나 포승면 원정리 괴태곶봉수에 이르는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 지역이 평택지방에 편입된 시기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다.
서정동이라는 지명은 서둔물에서 왔다. 앞서 말했지만 서둔물은 중앙동 서정초등학교 북동쪽 마을로 좋은 우물이 세 개나 있었다.
이 마을은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난민들이 정착하고 미군부대에 의지해서 먹고살려는 사람들이 복창동, 사거리, 신창리, 신장동 등에 모여들면서 마을이 커지자 1981년 송탄시 출범과 함께 서정동과 중앙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마을이 커지고 인구가 증가하면 행정편의를 고려하여 분동(分洞)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분동(分洞)으로 지역의 역사성이 훼손되거나 문화적 정체성이 무시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서정동의 분동은 이 같은 점에서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구에 따른 분동이어서 서정동이라는 지명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서둔물이 중앙동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같은 조처로 서정동은 “서정(西井)”이라는 마을과 우물이 없는 정체불명의 지명이 되었다.
청북고가도로는 중앙동과 서정동을 나누는 경계 구실을 한다.
서정동은 고가도로 북쪽의 점촌, 복창동, 지장동, 신창리, 절골, 사거리, 적봉리를 말한다. 이 가운데 본래부터 있던 마을은 점촌과 적봉리다.
그나마 점촌마을은 1920년대 초에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고, 옛부터 살아왔던 마을은 적봉리 뿐이었다. 하지만 적봉리도 본래 송탄지역이 아니라 고덕면에 속한 마을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부터 1백년 전까지 지금의 서정동 지역에 존재했던 마을은 하나도 없었다. 마을이 없을 때 이 곳은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 울창했던 야산과 논밭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던, 어쩌면 사람이 살지 못했던 이 땅에 마을이 이뤄진 것은 6. 25전쟁과 미군부대 주둔이 있고 난 뒤였다.
■낮은 자리에 살던 사람들
해방 후 처음 서정동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황해도 피난민들이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신흥교회 뒤 신창동이었다. 신창동은 숯고개 위쪽, 적봉리와 장등리, 금각리로 이어지는 산등성이 아래 마을이다.
좀 내려가면 평탄지대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곳은 논밭이어서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정착하기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이 마을은 지금도 황해도촌으로 불린다. 아직도 황해도 도민회가 큰 힘을 발휘하며 주민들 사이의 연대의식도 끈끈하다.
사거리와 복창동은 피난민과 미군부대에 기대살기 위해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뒤섞인 마을이다. 사거리라는 이름은 적봉리 근처 산등성이에 부대정문, 적봉리, 황구지리, 갈평 방향으로 갈라지는 네거리가 형성되면서 유래되었다.
복창동이라는 지명은 특이한 유래를 갖고 있다. 일설에는 “복(福)이 날로 창성하라”는 뜻에서 불려졌다고 하지만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그보다는 한 때 미군부대의 청소용역을 대행하는 “복창공사”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이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복창동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대부분 남한사람들이었지만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생활이 빈궁했다. 그래서 마을은 얼기설기 지은 판자집이 많았으며 양계장이나 고물상, 똥구덩이가 널려있는 지저분한 마을이었다.
그러던 것이 80, 90년대 도시개발로 주택이 개량되고 도로가 정비되면서 지금은 깨끗한 마을로 변모되었다.
절골은 신창과 복창동 사이에 있는 마을로 옛부터 약수암이라는 절이 있어서 불려진 지명이다. 점촌(店村)은 송탄소방서 뒤쪽 마을이다.
이 같은 이름은 전국 어디서나 발견되는 흔한 지명으로 어느 것을 막론하고 수공업자촌을 의미한다. 평택과 안성지역 대부분의 점촌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로 피신했던 신자들이 일군 옹기점이다.
서정동 점촌도 옹기점인데 처음 가마를 만들고 정착한 사람은 1920년대에 들어온 황금석이라는 인물이었다. 그 후 옹기장이들이 많아지면서 가마가 여러 개로 늘어났으며 나중에는 구워낸 옹기가 산을 이룰 정도로 발전하였다.
점촌에는 옹기점은 많았지만 민가는 몇 집 안되었다.
그나마 90년대를 전후하여 옹기산업이 쇠퇴하고 도시확장으로 연립주택과 빌딩이 들어서면서 옹기가마와 민가들이 사라져 이제는 점촌로라는 지명과 점촌식당으로 만 옛 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장동은 송탄출장소와 점촌 사이의 마을이다.
고려시대 송탄출장소 부근에는 지장사라는 절과 마을이 있었는데 이 절이 임진왜란으로 불타자 조선 후기 본래 위치에서 300여 미터 아래에 절을 중건하였고 나중에 마을도 함께 옮겨오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 마을도 도시개발과 신흥 주택단지 건설로 옛 마을의 흔적은 희미하며 지장초등학교라는 이름만이 옛 추억을 더듬게 한다.
적봉리는 사실 사거리나 신흥마을과 문화권이 다르다. 이 마을은 토착민 동네일 뿐 아니라 생활권도 장등리, 두릉리, 금각리와 같은 권역이고 초등학교도 대부분 금각초등학교를 다녔다.
옛 송탄시가 출범하면서 사거리와 길 하나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편입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감안하여 고덕면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군기지에 밀리고 세월에 차이고
서정동 답사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부대정문에서 사거리로 넘어오는 고갯마루에서 만난 고만복(70세)씨는 경기도 문산 미 수복지구에서 피난 온 실향민이었다.
피난민의 생활이 다 그렇듯 처음에는 살기 위해 평택에 내려왔다가 나중에는 미군부대에 의지하면 밥은 굶지 않을 것 같아 정착한 경우였다. 하지만 배운 것이 짧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몸으로 하는 노동일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는 것 뿐 아니라 자녀들 교육도 변변치 않아 이제 겨우 제 밥벌이를 할 정도라며 한숨을 쉬었다.
사거리 슈퍼주인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피난 온 실향민 2세였다. 내가 ‘아,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나오는 영변이군요’라고 말했더니 빙긋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50대 초반인 이 분은 이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터라 6.25전쟁부터 지금까지의 변화과정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1950년대 풍경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그 때는 부대 정문에서 넘어오는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신흥동, 사거리, 적봉리, 복창동 등에 마을이 있었는데 대부분 판자집이거나 루삥지붕이었다고 한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피난민들은 지주였거나 지식인출신이 많아서 미군부대를 끼고 부대물건으로 장사를 하거나 통역 등으로 금세 형편이 나아졌다. 교육열도 높아서 마을 아이들 대부분은 학교에 다녔는데 같은 반에서도 동령이나 이충동 같은 농촌아이들보다 입는 것이나 먹는 것이 훨씬 좋았다고 한다.
이 시절 부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창고였다. 부대는 마을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했으며 아이들에게는 군것질 거리나 장난감을 얻는 장소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까까운 길을 놔두고 일부러 부대방향으로 돌아다녔다. 그래야만 뭔가 하나라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 속에서만 들어왔던 “기브 미 쵸콜릿, 기브 미 츄잉껌” 세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도 어느새 50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적봉리는 눈물과 한이 서린 마을이다.
부대 담장 옆 산등성이에 달동네를 이루고 사는 이 마을은 미군기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붉은 황토마루 기슭에 40여 호의 집들이 모여 사는 평온한 동네였다. 그러던 것이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미군기지는 수 백년 동안 살아온 고향집과 산과 들 그리고 이웃들로부터 이들을 쫓아냈다. 지금처럼 보상과 이주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가라면 나가고 있으라면 있어야 되는 것이 조선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 중에 돈 있는 사람들은 아예 고향을 등졌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던 사람들은 부대 동쪽 나무내(목천)와 마을 뒷산 기슭에 나누어 이주하였다. 이주한 사람들에게 정부는 두 집에 한 동 씩 텐트를 쳐주고는 손을 털었다. 그 흔한 구호물자도 없었다. 텐트에서의 생활도 힘들었지만, 집과 땅을 빼앗긴 처지에 살아갈 길이 막막한 건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 후에도 사람들은 이 같은 고통을 두 번이나 더 겪어야 했다.
그것은 부러진 팔을 다시 부러뜨리는 야만적 행위였다. 그럼에도 소처럼 눈을 끔벅이며 정부의 정책에 순응했는데, 이번에 최후 통첩이 날아들었다.
미군부대를 확장하겠으니 나가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옛 주민들이 이주했던 마을만. 보상과 이주대책이 좋아진 세상이 되었지만 이들이 받을 보상은 거의 없다고 했다.
살고 있는 땅이 남의 종중산이기 때문이다.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에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평택시민신문 2002-08-30 (143 호)
신장1,2동
신장1동 구장터 ▷
1.기지촌의 여운과 쇼핑몰의 활력이 공존하는 곳
송탄하면 미군기지가 먼저 떠오른다. 이 곳에 미군이 주둔한 것은 1952년 6.25전쟁 중이었다.
미군기지는 토착민들에게 고향을 상실하는 아픔을 주었지만 피난민과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터전이었다.
꾸역꾸역 모여든 사람들은 미군기지 정문을 중심으로 기지촌을 형성하였다.
50년대나 60년대 가난한 민중들에게 기지촌은 엘도라도였다.
좀 배운 사람들은 부대에 취직해서 통역이나 사무직, 하다 못해 잡역부라도 해서 먹고살았고, 장사수완이 있던 사람들은 부대물건으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부대 앞에는 미군들이 드나드는 술집과 사창가도 형성되었다. 다양한 군상들이 모인 도시는 밤이면 흥청대다가 낮이 되면 김민기의 “기지촌”이라는 노래만큼이나 스산했다.
신장동은 경부선 철길을 경계로 숯고개와 나뉜다.
이 철길은 동네와 동네 뿐 아니라 미군부대지역과 옛 농촌지역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했다. 생경한 느낌의 부대주변과 옛 지역의 연결고리는 신장육교였다.
근자에는 신장육교보다 커다란 고가도로가 여러 개 생겼지만 척박했던 6, 70년대 신장육교는 경이로운 볼거리였다.
이 육교를 건너면 농촌풍경은 사라지고 흰색, 검정색의 피부를 가진 외국인과 이국적인 풍경이 눈길을 잡았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공간 이동이었다. 그 세계에는 번쩍번쩍하는 간판들, 헐렁한 군복바지, 쵸콜릿, 츄잉껌, 햄, 소세지, 치즈같은 물건들이 넘쳤다. 그래서 비행기 소음이 있어도, 고도제한을 당해도, 미군들이 행패를 부려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인내심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7, 80년대 경제개발로 미군들이 흘리는 달러의 위력이 감소하고,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미군부대와 미군은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부대 앞에서 몇 십 년 씩 장사하는 상인들도 이제는 미군보고 장사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머무는 동안 가게 안에서 물건을 고르던 몇 몇 사람들도 전부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쇼핑몰을 정비한 것을 반가워했다.
2.새 시장이 있어 신장동(新場洞)
신장동은 일제강점기 전에는 탄현면이었고, 갑오, 을미개혁 때는 일탄면과 이탄면이었다.
이시기 신장동에는 남산과 진위천을 중심으로 구장터, 나무내(목천), 제역동(제골), 남산터(지골)같은 크고 작은 마을이 있었다.
구장터는 옛 장터가 있던 마을이다. 19세기 말 일탄면 시절에는 면(面)의 중심이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마을의 모양과 골목길의 형태 그리고 길 좌우로 늘어선 집들의 모양이 옛 장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장터는 육로나 수로교통과 관련이 깊다. 구장터 마을 옆에는 진위천이 흐르고 냇가에는 나루가 있었다.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에는 조수(潮水)가 구장터 옆을 지나 오산천을 타고 갈곶리 부근까지 올라갔다. 물길이 열린 곳으로 소금과 새우젓을 실은 배들이 왕래하였고 각종 물화가 교역되었다. 하지만 구장터의 영화는 구한말 장터가 봉남리로 옮겨가면서 시들해졌다.
봉남리로 갔던 장터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경부선 서정역이 생기면서 서정리역 앞으로 옮겨갔다. 지금의 서정시장이다.
시장이 옮겨간 뒤 수 십 년이 지나고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지금의 중앙시장통에 시장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 시장을 “새시장”이라고 불렀고 한자로 “신장(新場)”이라고 썼다.
새 시장은 처음 5일장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상권이 커지면서 상설시장이 되었고, 지금은 대단위 쇼핑몰로 발전하였다.
나무내는 한자로 목천(木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나 근처 사람들 중에 목천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나무내”는 글자 그대로 “나무가 떠내려오는 냇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 옆에는 작은 내가 흐르는데, 장마철 냇가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떠내려왔다. 땔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 떠내려오는 나무는 귀한 재산이었다. 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건져 햇볕에 말려 땔감으로 썼다. 그래서 이 마을을 “나무내”라 불렀다.
미군부대 안으로 들어가버린 남산은 평택지역에서 정신사적으로 귀한 산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이 정치, 사회개혁을 외치던 16세기 중엽 이 곳에는 최수성이라는 인물이 살았다.
출생지는 강릉이었지만 8세에 진위현(평택)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이곳출신이라고 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최수성은 어려서부터 학식과 의리가 출중했던 터라 일찍부터 명현들의 가르침과 조광조, 김정, 최자반 등 명망 있는 젊은이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조광조와 김정은 일찍부터 출사하여 중종 때 개혁세력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최수성은 정치입문에 뜻을 접고 스스로 북해거인 또는 경포산인이라 하며 남산 기슭 원정령의 원정이라는 누정에 칩거했다. 하지만 그의 칩거는 “산수에 묻혀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삶”이었다.
조광조의 개혁 당시 원정은 개혁세력의 결집장소였다.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남곤, 최세절같은 훈구세력의 미움을 샀다.
결국 기묘사화로 조광조, 김정 등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 뒤이어 일어난 신사무옥으로 최수성도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최수성의 죽음은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사면, 복권되었다. 명분과 실력에서 앞섰던 사림파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사림파의 실권장악은 기묘명현의 명예회복을 의미했다.
최수성은 율곡 이이의 건의로 문정(文正)이라는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 같이 존귀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조상과 후손들의 격을 높여주고 사당과 묘를 조성하여 후세의 귀감이 되게 한다.
신장1동 제역동이라는 지명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유래되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농민들이 국가에 부담하는 역(役)을 면제해주고 대신 문정공 최수성의 묘와 사당을 관리하게 했던 마을이다.
하지만 미군부대가 들어오고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작은 농촌이었던 이 마을도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 제역동인지 조차 모를 정도로 도시화되었다.
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남산터 마을은 땅이 질어서 “지골”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지금도 전통마을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는데, 골짜기이면서 부대 담장 귀퉁이에 자리잡아서 모양이 후줄근하다.
3.소나무가 많아 송월동, 그러면 밀월동은?
신장동은 신장육교를 중심으로 북쪽은 1동, 남쪽은 2동이다.
1동은 옛 마을들이 대부분이라면 2동은 6.25전쟁 후 새로 생긴 마을이다.
마을이 들어서기 전 이 곳은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었다. 그래서 밀월동에서 사거리와 적봉리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참나무를 베어 숯을 만드는 가마들이 있었고 평탄지대에는 논밭이었다.
신장2동의 지명으로는 송월동과 밀월동이 있다.
송월동은 송신초등학교와 태광중, 고등학교 그리고 송탄역이 있는 지역이고, 밀월동은 송월동 서북쪽 경사지대다.
송월동이라는 지명은 소나무 송(松)자에 달 월(月)자를 쓰고 있어 “늘푸른 소나무 숲에 달빛이 교교히 비치는”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집들이 들어서기 전 이곳의 풍경은 그러했을 것이다. 같은 달빛이라도 산 위에 보는 달빛과 움푹 꺼진 분지에서 보는 달빛이 다르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지명에는 리얼리티보다는 일부러 멋스러움 낸 것 같은 인위적인 냄새가 난다. 인위적인 냄새는 밀월동도 마찬가지다.
밀(密)자에는 소나무, 참나무가 빽빽했던 밀월동의 옛 모습이 떠오르게 하지만 이것도 어느 특정인의 손때가 뭍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거진 나무숲에 푸르게 비취는 달빛이라니 정말 낭만적이다. 하지만 송월동과 밀월동의지명이 멋있기는 하지만 그것에는 일정한 한계가 내재되었다. 자고로 지명이란 사람들의 살 냄새, 땀 냄새가 깊이 베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장동 답사를 다녀오는 길에 한영애가 부른 “기지촌”을 듣는다.
“서산마루에 시들어지는 지쳐버린 황혼에, 창에 드리운 낡은 커튼 사이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로 이어지는 가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동두천을 배경으로 만들었다는 이 노래가 신장동 하늘에 와 닿는 것은 왜일까. 같은 하늘을 이고 있지만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역설일까. 숯고개 너머로 지는 노을이 스산하다.
– 평택시민신문 2002-09-07 (144 호)
송북동
세종때 재상 맹사성 소 타고 피리불며 지나던 거리 삼남대로
흰치고개 ▷
■삼남대로가 지나는 마을들
지금이나 옛날이나 평택지방은 교통의 요지이다. 나는 지금까지 평택의 옛길을 찾아내기 위해 무던히도 고심했는데 최근에서야 어렴풋이 실마리를 찾았다.
평택의 옛길은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대부분 주요 교통로에서 밀려났다. 유천동에서 소사동 구간도 그렇고 배다리방죽에서 칠원동길, 칠원동에서 도일동과 흰치고개를 넘는 길, 동막 백현원에서 작은 흰치고개를 넘어 진위로 가는 길, 진위에서 견산리를 거쳐 오산으로 가는 길이 그렇다.
근대이후 평택처럼 옛 길이 철저히 무시된 지역은 없다.
그것은 옛길이 걸어서 공무를 수행하는 보발(步撥)을 고려하여 만들어졌고, 신작로는 철도교통이나 상공업발달을 생각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소외되고 외면 당했던 삼남대로가 최근에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역사성과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할 수 있는 도일동에서 동막까지의 구간이 4차선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앞으로 동막에서 작은 흰치재를 넘어 진위면 봉남리까지 구간도 확장공사를 한다고 한다.
근대의 물결 속에 죽어 방치된 길보다 현재에도 적절히 활용되는 도로가 생명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화된 도로건설이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얼마나 살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얼마 전 도도로키라는 일본인이 쓴 삼남대로 답사기라는 책을 읽었다. 이 사람은 대동지지와 춘향전을 중심으로 옛 길을 답사했는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길까지 찾아내는 열성을 보여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오랫동안 큰 죄의식을 느꼈다. 누가 하든 상관없지만 어째든 이 사람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인 지리학도가 찾아 헤맨 옛 길에 평택지방의 길과 문화유산이 정연하게 소개된 것을 읽고는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솔직한 고백하지만 나는 우리고장의 옛 길을 전부 답사한 적이 없다.
도도로키가 아름답다고 말했던 숲안말에서 동막 사이의 고개를 넘어보지도 못했다. 갈원(칠원) 주막에서 남편 잃은 주모의 육자배기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흰치고개 넘어 백현원으로
삼남대로 지나는 길에 흰치고개는 평택지방에서 가장 험하고 높은 고개였다. 지금은 고개턱을 절반이나 깎아 야트막해졌지만 공사하기 전에는 무시 못할 만큼 높았다.
더구나 부락산과 덕암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와 계곡에는 심심찮게 산짐승이 출몰하였다. 그래서 삼남에서 올라오는 나그네는 고개를 넘기 전 도일동 감주거리(주막거리)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흰치는 국한문혼용 지명이다.
이 지명은 옛날 고개 봉우리가 석회질 토양이어서 희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흰치는 한자로 백현(白峴)이다. 한자와 한글의 차이일 뿐 백현이라는 지명은 흰치, 흰고개와 의미에서 같다.
안성천을 건너 평택 땅으로 넘어온 나그네가 땀에 범벅이 되어 휘적휘적 흰치고개를 넘으면 동막(東幕)과 우곡(牛谷)마을이 나왔다. 나그네는 이 곳에서 땀도 식히고 출출한 배도 채워야 했다. 때로는 봉놋방에서 잠을 자야 할 때도 있었다.
더구나 공무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원에게는 이 곳이 진위객관과 갈원의 중간이어서 다리 쉼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곳에 백현원이라는 역원을 설치하였다. 백현원은 설치 초기부터 나그네의 주요 쉼터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 역원들이 옛 주막자리에 설치되었으므로 고려시대에도 이곳은 주요 쉼터였을 것이다.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사연이 남기 마련이다. 백현원에는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고불 맹사성에 관한 고사가 전해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공당문답이 그것이다. 잠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맹사성의 고향은 아산시 배방면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6백년이 넘는 그의 고택이 남아있다.
맹사성은 고향에 갈 때나 한양으로 올라갈 때 삼남대로를 지나갔다. 평소 소를 타고 피리를 즐겨 불었다고 했으니, 소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으면 배방면에서 백현원까지는 하루 길이었다. 한 번은 맹사성이 고향에 갔다가 한양으로 가던 중 비를 만나 백현원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주막 안에는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젊은이가 먼저 와서 자리잡고 있었다. 맹사성이 구석에 자리를 잡자 심심하던 젊은이는 장기 한판 두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맹사성이 연거푸 몇 판을 이기자 부아가난 젊은이는 유명한 공당문답을 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을 놀리기 위한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맹사성은 빙긋이 웃으며 응했다. “그래 젊은이는 어디로 가는 공?, 한양으로 벼슬하러 간당, 벼슬자리 내어줄 사람이라도 있는 공?, 없당, 그럼 내가 한자리 마련해주면 어떻겠는 공?” 그러자 젊은이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바라지도 않는 당”하고 대답했다. 나이 먹은 늙은이의 실없는 농담쯤으로 여겼던 탓이다.
얼마 후 과거가 끝난 뒤 급제자들이 정승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맹사성은 윗자리에 앉아 급제자들을 내려보고 있는데 그 중에 백현원에서 만났던 젊은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장난기가 발동한 맹사성은 “그래 과시는 잘 보았는 공?”하고 물었다. 깜짝 놀란 젊은이는 고개를 들어 맹사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승이 앉는 자리에 백현원에서 자신이 놀렸던 꽤죄죄한 늙은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맹사성이 다시 물었다. “급제한 기분이 어떤 공?” 그러자 젊은이는 땅에 코를 박고 “죽 ~ 죽고만 싶당”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젊은 급제자의 태도에 어리둥절한 대신들에게 맹사성이 내막을 이야기하자 방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공과 사를 구분 못할 맹사성이 아니었다. 이 일로 자신의 교만함을 반성하고 크게 깨달음을 얻은 젊은이는 그 후 크고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동막(東幕)이라는 지명의 의미
동막은 송북동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에는 조그만 저수지가 있고 규모도 아담해서 최근에는 전원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동막(東幕)이라는 지명은 전국 어디서나 쉽게 발견되는 지명이다. 가장 잘 알려진 곳으로는 황석영의 장길산에 자주 등장하는 마포 동막을 들 수 있다.
송탄시사에는 동막(東幕)의 유래를 “산이 동쪽으로 막(幕)처럼 둘러 쌓여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동막 동쪽으로는 덕암산 연봉들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막을 치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지명에서 이 같은 이유로 지명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는 관아 동쪽이어서 동문, 서쪽이어서 서문밖, 감옥이 있어서 옥터골 같은 지명이 생긴 것처럼, 관아시설이나 특이한 나무, 사당, 주막과 같은 상징성이 있는 것들이 지명형성에 영향을 준다.
이처럼 동막도 막(幕)을 “막을 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보다 “주막의 동쪽”이라는 듯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어느 쪽에서 동쪽일까? 동양에서의 방위는 궁궐이 중심이다. 지방의 경우 궁궐이 있는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거나 궐패를 모셔두는 “객사”가 중심일 수 있다.
동막은 북쪽에서 남쪽을 내려다볼 때 백현원 주막의 동쪽이 된다. 그래서 “동막(東幕)”이다.
전에 동막마을을 답사하면서 어이없는 일을 당한 적이 있다.
마을 안에는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느티나무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 마침 노인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그래서 때는 지금이다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반갑게 맞이하면서 마을의 역사며 옛 모습,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구수하게 말해주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마을을 나오다가 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할아버지가 한 분을 만나 몇 가지 궁금했던 사실을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전에 말씀하신 분과 내용이 전혀 달라 이의를 제기했더니 이분 말씀이 느티나무 밑에서 만났던 분은 정신이상자라고 하였다. 그 때 느끼는 허탈감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밖에 안나온다.
동막 주변에는 다양한 지명들이 많다. 남쪽으로는 부락산 능선 따라 형성된 계곡마다 이름이 있고, 동북쪽으로 덕암산 줄기에 무수한 계곡과 고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백현원을 지난 삼남대로는 동막 서남쪽 염봉재를 옆으로 끼고 오룡동이나 숲안말로 넘어갔다. 숲안말 길이 샛뚝거리를 지나 봉남리로 넘어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길로 관원들이나 장사꾼들, 자보러 가는 아낙들이 넘어 다녔다.
염봉은 소금 염(鹽)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옛날에는 “소금재”로 불렸을 것이다.
“구행길골”은 이 지역의 옛길의 변화과정을 말해준다.
백현원을 지난 삼남대로가 봉남리로 넘어가는 길은 시대에 따라 숲안말 길, 오룡동 길, 오리골 길 등 다양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 숲안말 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길이 바뀌었는데 옛 길을 “구행길”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지명에서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큰길을 “행길”이라고 부르는데 행길은 “한길”에서 온 이름이다. 안성천이나 충남 대천을 한내라 하고 대전의 옛 이름이 한밭인 것과 같다.
■소(蘇)씨들이 살아서 소골이다
송북동 우곡마을은 본래 소(蘇)골이라 불렸던 마을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 마을은 진주 소(蘇)씨의 동족마을이었다. 진주 소(蘇)씨는 고려시대부터 평택지방의 큰 성씨였다.
도일동 예좌울이나 칠괴동의 개척자도 소(蘇)씨였고, 원도일 마을에도 소(蘇)씨가 여럿이다. 이 같은 행적을 추적할 때 소(蘇)씨들은 고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송북동, 도일동, 칠원동 일대의 대 토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였던 소(蘇)씨 가문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분명 16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무인이었던 소흡같은 인물이 명성을 떨쳤던 것으로 미루어 이와 같은 사실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지역을 호령하던 명문거족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모반에 가담하여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대 토호가 모반에 가담하여 멸문지화를 당한 일은 쉽게 발설할 내용이 아니다. 비석을 세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더욱 힘들다.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 멸문지화라는 것이다.
기록에 없는 일들이지만 민중들의 소망과 잇닿아 있는 사건은 설화나 전설로 남게된다. 그것이 민중의 힘이고 저항이다.
소골에는 진주 소(蘇)씨 가문의 멸문과 관련된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소골마을 골짜기에 있는 “풀무골 전설”이 그것이다.
고려 공민왕(1360년 경) 때 소(蘇) 정승이라는 분이 살았다. 부락산 계곡 마을마다 그를 따르고 숭상하였다고 하니 힘께나 쓰는 토호였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젊은 승려 신돈을 앞세워 원나라를 몰아내고 정치, 사회적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돈의 개혁은 친원파와 권문세족의 반발에 부딪쳤다.
소(蘇)정승도 신돈의 개혁에 반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신돈을 제거하기 위하여 병사를 모집하고 불악산 골짜기에 대장간을 만들어 놓고 병장기를 만들며 때를 기다렸다. 주변의 호응도 좋아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군사를 일으킬 때가 가까워오자 소(蘇)정승은 가족들을 불러모아 출병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며느리가 말하기를 “아버님, 벼 한말을 찧어 쌀 한 말이 나올 때에 출병하여야 성공할 것이니 한번 해보소서”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소정승은 “어찌 벼 한말이 쌀 한말이 되랴마는 네 말이 상서로워 한 번 해보도록 하자”라고 하며 한인을 불러 벼 한말을 찧도록 하였다. 하지만 찧어보니 8되 7홉 뿐이라, 소정승은 하인이 됫박질을 잘못하여 그렇다고 꾸짖고는 다시 찧게 하였더니 9되 7홉이 나왔다. 3홉이 모자라자 며느리를 불러 “어찌 벼 한말로 쌀 한말이 나오겠느냐, 터무니없는 말로 나의 마음을 흩으려 하지 말라”라고 꾸짖고는 출병을 강행하고 말았다. 하지만 소(蘇)정승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정부에서는 이를 탐지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불시에 공격하여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반란군을 격퇴하였다. 거사가 실패하면서 소(蘇)정승은 역적으로 잡혀 처형당했으며 가족들은 삼족이 멸하는 참화를 겪었다.
관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소(蘇)씨 집안 종산의 맥을 끊고 묘혈을 파헤쳤는데, 이곳에서 팔다리가 자라지 않은 용이 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거사의 실패를 아쉬워하며 마을 우물에 무기를 모두 묻고는 병장기를 만들었던 골짜기를 풀무골이라고 불렀다.
민중들의 암묵적 지지를 받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모반은 애잔한 한(恨)과 슬픔을 담고 있다. 실패한 모반에 대하여 연민과 슬픔이라니, 그것은 민심이 정권을 부정하고 현실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蘇)씨들이 멸문하고 파묘까지 당한 마을에 조선 후기 광산 김씨가 들어왔다. 그 사이 파묘되었던 소(蘇)씨 묘역도 복원되었다. 요즘에는 후손들이 시제도 모신다고 한다.
■땅이 건조해서 건지미, 북어를 말려서 북어울?
건지미는 소골(우곡)과 오좌동 사이의 마을이다. 몇 년 전 “기차옆에서”라는 이색 카페가 들어선 마을이기도 하다.
건지는 우리말로 “마른 땅”이다. 건지라는 지명의 포인트는 “건”자인데 다른 지역에서도 이 말은 “마르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한국지명총람이나 송탄시사에도 “땅이 떼가 마를 정도로 건조하고 메말라서 “건지”라고 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지형적으로 볼 때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건지마을은 형세가 여인의 자궁같은 지형에서도 남향을 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지산천이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물 걱정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우물은 물론이고, 경지정리가 되기 전에도 물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건지=마른 땅”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요인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유일한 단서가 둥(동)실봉 너머 “북어울”이라는 지명이다.
북어울은 옛날에 개울 옆으로 북어를 말려서 “북어를 말린 개울”이라는 유래를 갖고 있는 지명이다. 이곳에서 북어를 씻어 말렸다면 햇볕이 잘 드는 “건지미”에는 건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어를 말리는 곳이라는 뜻에서 “건지미(미는 마을 또는 터와 같은 의미)”라고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추측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북어울=북어를 말리던 개울”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북어울은 그런 의미와 관련이 없다.
북어울은 둥실봉 북쪽 계곡에 흐르는 개울이어서, 건지미에서 불 때 “북쪽 산자락의 여울”이기 때문에 “북여울”이라고 불렸다. 그랬던 것이 북여울> 북어울로 음이 바뀌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건지미=북어를 말리던 곳”이라는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정말 오리무중이다.
건지미는 크게 윗건지미와 아랫건지미(신흥)로 구분되고, 윗건지미는 다시 양달말과 응달말로 나뉜다.
양달말은 햇볕이 잘 들어서 불려진 이름이고 응달말은 그 반대이다.
아랫건지미는 100여 년 전에 형성된 동네이다. 처음에는 오좌동 수성 최씨들이 한 두 집 들어와 살다가 나중에는 전주 이씨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 마을이 신흥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정부수립 후 행정제도를 개편할 때였다. 작명한 사람은 마을 구장(이장)이었다. 이 사람 생각에는 기왕에 윗 건지미가 있기 때문에 지명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흥”이라고 한 것이다.
아랫건지미 마을은 최근 10년 동안 가장 많이 변한 지역 중 하나다.
마을 앞으로는 아파트가 줄지어 들어섰고 주변에 각종 상가들이 빽빽하다. 마을 사랑방에 마실 오는 노인들도 점차 줄고 있다고 한다.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한 진통이다.
■최자반의 효성이 깃든 오좌동
오좌동은 수성 최씨들이 수 백년을 살아온 마을이다.
평택지방 수성 최씨의 입향조는 세종, 성종 연간에 도화원 화원으로 이름을 날렸던 최경이다. 최경은 유림과 유용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로부터 안양공파와 가산공파가 나뉘어졌다.
오좌동을 개척한 이는 모정 최자반이다. 최자반은 안양공 최유림의 손자이고 최윤신의 아들이다.
최유림 이후 수성 최씨 가문은 무인으로 출세한 사람이 많았고 이후에도 최희효 같은 출중한 무인들이 배출되었지만, 최윤신, 최자반에 의해 문인적 가풍도 함께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최자반은 학문적으로 기묘명현인 최수성, 김정 등과 교유하였고 마을 뒤 둥실봉에 “모정”이라는 누정을 지어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바쳤던 인물이다. 특히 문중설화로 전해지는 시묘살이와 관련된 효성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가문의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잠깐 그 이야기를 하고 가자.
“최자반의 부친은 최윤신이다. 부친이 죽자 최자반은 6년의 시묘살이를 결심하고 묘소 옆에 산막을 지었다. 물도 없는 험한 산 속에서 생활하는 시묘살이는 맹수들의 위협과 극심한 외로움의 나날이었다. 백일이 지날 무렵 저녁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너의 효성이 지극하므로 물을 줄 것이니 아침 저녁으로 정한수를 올리고 기갈을 면하여라”고 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 산신령의 말대로 움막 앞의 땅을 맨손으로 팠더니 맑은 샘물이 솟아올랐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디선가 한 쌍의 학이 날아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최자반의 곁에 머무르며 벗이 되어 주었다.
삼 년 시묘를 살고 다시 삼년상을 시작하는데 갑자기 몸이 아프고 오한이 났다. 불효하는 마음에 통곡을 하다 기진하여 쓰러졌는데 이번에도 산신령이 나타나 “너의 지극한 효성을 갸륵히 여겨 희생환을 줄 것이니 시묘를 더울 열심히 하라”라는 말과 함께 환약 3알을 주었다. 이 약을 먹고 6년의 시묘살이를 무사히 마치니 그동안 솟아오르던 물이 메말라버리고 학이 하늘로 비상하며 사라졌다.
그 후 사람들은 학이 노닐며 오동나무 열매를 따먹었다는 봉우리를 “동실봉(오동나무 열매가 있는 봉우리)” 라고 하였다.
시묘살이를 끝낸 뒤 최자반은 오좌동을 개척하고 마을 뒷산에 모정을 짓고는 명유들과 교유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평생을 보냈다.
문중설화는 어느 집안을 막론하고 가문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약간의 첨삭을 하는 것이 사살이다. 시묘를 살았던 곳이 소골 뒤 부락산 자락이었던 점을 생각할 때 동실봉(둥실봉)의 유래도 앞 뒤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최자반의 인물 됨됨이와 오좌동이라는 마을의 형성과정을 잘 말해주는 중요한 이야기다. 어쩌면 “오좌동”이라는 이름도 “오동나무의 좌측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평택시민신문 2002-09-18 (145~146 호)
지산동
지형이 삼태기 같아 좌울, 사당패 흔적이…
««쑥고개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
지난 화요일 학교에서 근무 중에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내 글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고 자신을 밝힌 이 분은 동막이 고향인 이창우 옹(79세)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수 십 년이나 되었고 중앙부처의 국장을 지내는 등 사회적으로 출세한 분이었지만 고향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젊은 사람보다 나았다.
이창우 옹은 친절하게도 백현원 터라든가 염봉재의 위치, 태봉산, 남은터 골, 동해울고개, 장고개 같은 옛 지명들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나는 이 분의 말씀을 들으며 강호에는 숨은 고수가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다.
이창우 옹에 따르면 내가 밝힌 백현원 터는 위치 고증이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본래 백현원은 흰치고개 밑이 아니라 염봉재 남쪽자락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을 옛날사람들은 주막거리, 또는 주막뜰이라고 했으며 자신이 어릴 때만 해도 기와라든가 사금파리가 수북했었노라고 하였다.
주막이 관아가 있던 봉남리에 있지 않고 이 곳에 있었던 것은 진위현 관원들의 텃세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흰치고개는 곱돌이 나오는 석회질이어서 먼발치에서 보면 유난히 희게 보였기 때문에 “흰치”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다가 백현원을 두면서 지명을 한자화하여 흰치=백현(白峴)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는데, 봄이면 고갯마루에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서 참 볼만했다고 회상하였다.
이창우 옹의 주장은 동막입구에 사는 이상진(49세)씨의 증언으로 재차 확인되었다.
이상진 씨는 흰치고개에서 동막을 지나 염봉재와 오룡동으로 갈리지는 대로(大路)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자신의 집자리가 옛 주막자리였다고 주장했다.
이상진 씨와 삼남대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흰치고개 부근 삼남대로가 옛날에는 지금과 다른 길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 분에게는 1950년대 것으로 여겨지는 항공사진이 있었는데, 이 곳에도 산줄기와 다랑이 논을 경계로 옛 길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었다.
■숯고개인가 쑥고개인가
송탄이라는 지명은 송장면과 탄현면(일탄, 이탄)이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송장면에는 장안동, 동령, 이충, 서정과 같은 마을이 있었고, 탄현면에는 좌동, 제역동, 나무내, 구장터, 남월, 오좌울, 건지미, 지산리, 소골, 동막 등이 있었다. 탄현(炭峴)은 우리말로 숯 고개이다.
옛날에는 숯 고개에서 장등리로 이어진 산등성이에 참나무가 많아서 능선을 따라 숯가마가 여러 개 있었는데 숯을 한 짐씩 짊어진 짐꾼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기 때문에 숯 고개라 불렸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자연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숯 고개”라는 지명이 마을의 이미지를 흐리고 촌스럽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바꿔 부른 것이 “쑥 고개”다.
사실 숯 고개나 쑥 고개 모두 세련된 근대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숯”이 갖는 시커멓고 촌스런 이미지보다는 쑥에서 풍기는 향기롭고 풋풋한 느낌이 마을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중요했던 논쟁에서 재판관 역할을 한 것은 행정관서였다.
평택시는 쑥 고개보다 숯 고개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그 상징적인 노력이 흰치고개 중턱에 재현한 숯가마였다.
6. 25전쟁 전까지 숯 고개 주변에는 거의 마을이 없었다.
우리은행과 중앙의원 주변에만 민가가 서너 채 있었고 고개 양쪽에는 참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졌다. 그러던 것이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행정관서와 은행, 시장이 형성되었고, 나중에는 터미널까지 자리잡았다.
평택사람들이 숯 고개 주변을 “국민은행 옆” 또는 “파출소 앞”, 아침시장 건너편 등으로 부르게 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사당패의 흔적이 남아있는 좌울
우리고장의 옛 지명에는 “예좌울”, “가재울”, “장좌울”처럼 “울”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울”은”울 안”, “울 밖”과 같이 공간의 안쪽을 의미하는데, 국가나 마을, 집안을 상징하는 말이다.
주변에서 많이 쓰는 “우리”라는 말도 본래 “울(월)”에서 나온 말이고, 수도(首都)의 순수 우리말인 “서울”도 같은 의미였다.
송탄지역에는 ‘울”과 관련된 오좌울, 남월과 같은 지명이 있고 좌울(월)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 왜 “우(右)울”이라는 지명은 없고 “좌(佐)울”만 있을까?.
지명에서 “좌”라는 명칭은 “오좌울(동)”이나 “가좌울(가재동)”, “예좌울(도일동)”처럼 지형이 삼태기처럼 둘러쳐진 지형에서 나타난다.
“좌울”도 야트막한 구릉이 삼태기형으로 둘러 처져 있기 때문에 “지형이 삼태기처럼 둘러쳐진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좌울은 안성의 청룡마을처럼 옛 걸립패의 근거지였다.
걸립패는 전문연희패이지만 때때로 마을 두레패가 겨울을 이용하여 걸립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단체의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풍물치는 실력만큼은 근동에 최고여서 자부심이 대단했고 혹자는 동령마을 두례패와 견주기도 했다.
좌동으로 불리는 좌울은 송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장육교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개발되기 전 약 40, 50여 호의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 마을 주변도 온통 야산과 논밭뿐이어서 아이들이 송북초등학교에 가려면 논 뚝 길을 걸어다녀야 했다.
그러던 것이 10여 년 전에 산업도로가 건설되고 신도시 개발로 미주, 건영, 현대, 장미, 제일, 쌍용아파트 등이 자리잡으면서 크게 변모하였다. 개발은 거의 완성되었지만 빌딩과 아파트 사이사이에는 아직도 옛 토착민들의 집들이 삐쭉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누더기 같은 루삥지붕에는 주먹만한 돌들이 올려져 있고, 아파트 아래 처연히 남아있는 낡은 기와집 지붕에는 가을햇살에 호박이 빨갛게 익는다.
개발경제의 뒤 안이다.
-김해규/평택시민신문2002-10-04 (147 호)
자연환경[지 리] : 위치/지세/평야
지리
1) 위치
(1)地理的 位置 : 송탄은 동경 127°02′ 에서 127°08′ 북위 37°01’에서 37°06′ 사이에 들며 한반도의 中西部에 위치한다.
(2)自然的 位置 : 송탄은 新增東國與地勝覽의 振威縣편에 의하면 한양에서 忠淸道에 이르는 三南大路上에 있어, 牛馬의 왕래가 빈번하고 관백의 기숙이 심하였던 곳이라 하였듯이 서울에서 1번 국도가 관통하는 곳으로, 용인에서 발원한 진위천(옛 : 長好川)과 牙山으로 흐르는 통복천(通福川)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지대로 형성되어 있어 京畿米 중 平澤米의 생산지였으며, 예전에는 (남양 : 아산만이 형성되기 전) 나룻배가 드나들던 곳의 상류로서 뱃사공의 거주지가 되기도 한 고장이다.
(3)關係的 位置 : 송탄은 서울과는 60여km 이내에 위치하면서 서울의 위성 도시 역할을 하고 있으며, 市 전역에 낙농업이 성행하고, 사과·배·복숭아 등 과수 재배가 활발하여 요즘은 인삼 재배지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2) 지세
지세는 廣州山脈과 車嶺山脈 사이의 西南쪽 차령산맥에 치우쳐 위치한다고 보며, 해발 200m 이내의 낮은 산세가 동북으로 丘陵地帶를 이루고 西쪽에 平野를 이루면서 작은 河川들이 서해로 흐르는 형세를 지닌다.
송탄의 산지는 德岩山(해발 164.5m)을 동쪽에 두고 서쪽으로 내리면서 負樂山(해발 150.5m)과 마주하여 무수한 谷을 만들며 남서쪽으로 내린 산자락은 안성·평택군과 경계하며 통복천에서 끊기는 지세를 지녔으므로 북쪽의 진위천과 동남의 통복천 사이에서 자리한 德岩山 산세는 동쪽을 막아 평택·안성과 경계함으로서 서쪽의 평야 지대에 위치하는 고장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마을의 형성이나 국가·행정 구역의 구분은 산세·수세에 따라 구분되었기에 주로 평야 지대에 위치한 송탄은 하천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지명 또한 하천에 연관된 것이 많다. 송탄시의 하천은 다음과 같다.
① 振威川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에는 長好川으로 나타난다.)
진위천은 용인의 처인 동편에서 발원하는 수맥과 양지 서편에서 내리는 小川이 합류하여 수원에서 내려오는 황구지천과 만나 아산만으로 흐른다. 총 연장 2.3km의 하천으로 어비리 저수지(송전 저수지)에서 황구지 사이의 진위·서탄면을 관통한다.
② 도일천 (道一川)
원천은 도일리 상리의 德岩山에서 발원되고 평택시를 거쳐 진위천과 합류하는, 총 연장 4.58km의 하천으로 상리천·가재천(상가재리-도일천)·원천(하리 서쪽-도일천)·칠괴천(칠괴리-도일천)·내리천(내리 저수지-도일천)·장안천(장안리-도일천 : 연장 3km) 등의 細川을 가진 송탄의 젖줄이다.
③ 서정천 (西井川)
신창에서 갈평을 거쳐 장당리에 이르는 하천으로 평택군을 경유하는 진위천에 합류하며 구간별로 점촌천과 장당천이라 부른다. 총 연장 1.17km로서 옛적에는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④ 지산천 (芝山川)
동막 저수지를 수원으로 하여 내리면서 불악산에서 내리는 물과 합류하고, 목천과 구장터를 지나 진위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細川은 좌동천(불악산~지산천)·동막천(동막부락~지산천)·오좌천(오좌동~구장터)·우곡천(소골~지산천)으로 나누어지며 총 연장 3km에 이른다.
3) 평야
평야란 ‘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덕암산·불악산을 따르는 해발 160여m의 능선을 좌우로 완만한 구릉 지대가 형성되어 내리는 계곡 사이로 들을 형성한 송탄의 평야 지대는 전체 면적의 38%로서 산림이 차지한 41%보다 낮으나, 서북편으로 시와 경계한 서탄 지역의 평야와 남서쪽 고덕들과 연계되는 지역들이 평택 평야요, 곡창 지대라 일컫는 만큼 송탄시의 농경지 비율은 적다고 볼 수 없다.
동부 지역에 위치하는 산맥들은 차령산맥의 북쪽 끝을 이루고 대부분 노년기의 편마암층을 이루고 있어, 점차 주거지의 확장과 공단 조성 등에 따라 쉽게 개발되고 산이 깎여 평지가 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송탄은 농경지의 광활함과 함께 공업 단지화 되고 있다.
자연환경[기 후] : 계절과 기온/강우량/서리
기후
1) 계절과 기온
송탄은 비교적 낮은 구릉 지대를 이루고 있는 평야 지대로서 기온은 특별한 특징이 없이 중부 서안형(中部西岸形)에 들고,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겨울에는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한냉 건조하며, 여름에는 북태평양 기후의 영향으로 고온 다습하다.
바람은 1~3월과 9~12월에 서북풍으로 4~6월은 동남풍이며 7~8월은 서풍이 불어온다.
년평균 온도는 12.9℃로서 최근 10년간을 기준으로 최저 평균 6.89에서 최고 평균 17.6℃로 나타나며,
1990년도의 최저 기온은 -7.2℃였고, 최고 기온은 32℃였다.
수원 지방의 평균 기온 10.9℃ (최고 16.1, 최저 5.7)보다 다소 높은 기온을 보이는 송탄은, 인근 화성·평택보다 서해안에 근접되지는 않기 때문이라 볼 수 있으며, 일교차가 큰 4월과 10월에는 복사 현상에 의한 안개 일수가 많다.
2) 강우량
매년 3월이면 중국 화북 지방의 황토(黃土)가 불어와 黃砂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서풍의 영향이며, 여름철에 폭풍우를 동반한 동지나해의 열대성 저기압의 영향은 비교적 적게 받는다.
년중 강우량은 평균 1,182㎜ (1981~1990년 평균)로서 전국 평균 강수량인 1,150㎜에 비견하여 볼 때 차이가 없으며, 통상 6~9월 사이에 연 강수량의 70%가량 내려 여름철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며 겨울에는 10%에 불과하여 계절적 편차가 크다. 그러므로, 여름에 집중되는 집중 호우의 영향이 크고 작은 피해를 주게 되나, 송탄은 비교적 관개수로가 잘 되어있고 높은 山岳이 없어 큰 피해없이 지내고 있다.
3) 서리
서리는 매년 10월 중순에 시작하여 이듬해 4월 초까지 내리며, 농작물에 영향을 주고, 눈은 연평균 10일 전후로 많지 않으나, 대략 11월 중순에 시작되어 이듬해 3월 초에 끝난다. 적설량은 불과 20㎜안밖으로 볼 수 있고, 얼음은 10월 말에서 이듬해 3월 중순까지 볼 수 있다.
인문환경
人文環境
송탄은 행정 구역의 변화가 크게 심하지 않아 비교적 인구 변화의 추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세종실록 地理志에 나타난 진위현의 인구는 535명이고, 待衛軍 10 名, 船軍 51 名으로 나타난다.
여기서의 진위현은 송탄만이 아니라 인근 서탄·마산면 등지를 포함한 숫자로 실제 송탄면의 인구는 1759년 간행된 여지도서에서나 알 수 있다.
탄현면의 인구는 601명으로 현재의 신장1동·지산동 일대를 말하며, 송장면은 지금의 동령·이충리 부근을 말하며, 농촌 지역이고, 여방면은 도일리·평택시 북쪽 일대를 포함하면서 현재의 도원동을 말한다.
송탄의 1991년도 총인구 7만 8천여명으로 보아 230여년 세월에 1천 3백여명에서 60여배 늘어난 것이다.
송탄의 취락은 山·水가 적당히 조화된 평야지대의 농촌형 취락으로 보며, 대부분 비슷한 유형을 가지고 있다. 송탄의 가옥은 남방식으로 초가는 그 흔적이 없으나 지붕만 개량된 집들은 주로 “ㄱ·ㄴ·ㅁ”형의 구조를 가지며, 기와집들은 “ㄱ·ㅁ”형이 많다. 송탄의 가옥 중 한국 전쟁 이후 유행한 판자집·루핑집이나 블록집들은 주로 ‘ㅡ’형 이었으나, 지금은 도시 계획으로 볼 수 없다. 또
일본식 가옥도 ‘ㅁ’자 형으로 있었으나 지금은 창고 정도만 남아 있다.
성 씨
성씨
성(姓)이란 한 문중 또는 혈연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자신의 뿌리를 나타내고 이름과 함께 자신을 대표하는 방법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성의 기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문자가 쓰이기 시작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볼 수 있다.
국가의 형태가 견고해지는 통일신라 이후 성은 지방의 호족(豪族)과 왕족, 귀족 층에 널리 퍼지고 혈연과 지연 및 관직에 의하여 본관이 발생하고 문중인 상호간의 서열을 말해주는 행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의 제도를 만들어 감에 따라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성씨 제도가 확립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가문과 문벌을 중요시하는 사회상에서 각종 성씨 제도가 있어 왔으니 즉, 각종 금혼 제도가 그것으로 핏줄을 중요시 하였던 한민족의 단일 민족적 특성을 잘 나타내 보인 것이라 하겠다.
송탄의 성맥은 역사적으로 경기도 진위군 안의 송장, 여방, 탄현면에 분포된 자연 마을의 호족성에 찾을 수 있다.
1843년, 1891년 발행된 진위현지에 보면 김(金), 이(李), 류(柳), 최(崔), 송(宋)씨가 주요 성으로 나타나며, 진위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로서 김·이·최씨 등 3대성이라 하였다.
한 지역의 토성(土姓)은 부락별로 밀집되어 있으면서 오랜 세월을 세거하는 동안 문중의 흥망 성쇠에 따라 없어지기도 하고, 더욱 번성하기도 하였다.
송탄에는 대소 10의 집성이 조선 초기 이래로 세거해 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송탄의 성씨는 1991년 9월 말까지 조사로는 총 136개 성으로서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전국 250여 성이나, 동국여지승람상의 227종, 조선 숙종조 이선현이 분류한 298성, 1935년 국세조사서에는 235성으로 나타났으나 송탄에 존재하는 성씨는 그보다 작다고 할 것이다.
선비정신: 차원부/오달제/조광조/이탕/이헌방/최수성
차원부(車原부)
차원부(1320~1398)선생은 고려말에 정국이 혼란하고 국운이 기울 때, 정도전·길야은 등의 충신들과 시국을 논하며 충정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을 흘렸던 충신으로, 후일 두문동 72인으로 조선개국에 세상을 등지신 중의 한분이다.
공은 용모가 훤칠하고 천성이 온후하며, 경서와 사학에 통달하여 공민왕 3년(1364)에 문과급제하고 간의대부의 벼슬에 올랐다. 공은 문인화가(文人畵家)로서 사군자에 조예가 깊고, 특히 매화그림은 세인의 추종을 불허하여 선배인 정지상(鄭知常)과 더블어 고려 오백년에 쌍벽으로 불렸다.
공은 고려의 충신으로 왕에게 바른 말을 잘하는 10명의 신하중 일인자였으나, 공은 고려가 망해감에 따라 도저히 망국(亡國)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관직을 내놓고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운둔하였다.
고려의 망국의 가까울 때에 이성계(태조)장군과 이방원 부자가 함께 공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였다. 평소 이 장군은 운암공을 존경하였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왕위 등극으로 조선이 세워진 후, 신하인 조준과 이양우를 특사로 하여 운암공에게 이조 개국공신으로 책록하겠다고 전하니, 운암공은 “우리집안 대대로 고려왕조의 벼슬을 받은 지 이미 오백년 이며, 공양왕(고려 34대 마지막 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두마음으로 우리 선조의 충렬(忠烈)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며 거절하였으며, “차라리 다섯말의 식초를 마실지언정 이조(李朝)의 훈작은 받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태조는 군신지간이 아닌, 옛 친구로써 모셔오도록 관포와 말과 예물을 보냈으나, 또 거절당하였다. 그래도 이 태조는 하루에 다섯번의 왕명을 내리고 한 달에 세 번의 특사를 보내어 간청하였다. 한데 번번이 거절하기를 수 개월 간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결국 공은 이 태조의 우정에 감격하여 말 대신에 당나귀를 타고 한양에 답례차 들어갔다.
이 태조는 매우 환대하여 몇 달 동안 담소를 즐기면서 별궁(別宮)에 머물게 하였다.
이로써 운암공은 이태조와 이방원 부자를 도와준 일이 있었으나, 후일 죽임을 당하는 이율배반적 일이 발생하니, 이조 개국 공신인 정도전·하륜 등 4명은 차씨의 서외손(庶外孫)이어서 운암공이 수운암동에서 차,유씨 대동보(車, 柳氏 大同譜)를 만들어 해주 신광사에 보관시킬 시, 그 대동보에 들어 있는 위 사인은 자신의 이름위에 서(庶)자를 넣은 것에 앙심을 품었고, 그 중 하륜(河侖)이 앞장을 서서 “운암공은 역적 정몽주의 외종형이며, 이조의 건국에 참여 하지 않고, 당시 세자인 방석의 비와 증조부 벌이 될 뿐 아니라 지금 역적 정몽주의 잔당과 음모를 꾸미니 제거해야 한다.” 고 모략을 이방원에게 하였던 바, 이방원은 그렇게 하라고 승낙하였다.
이에 하륜은 이방원의 막하 장군 이숙번에게 이방원의 가병(家兵)을 인솔하여 태조와 작별하고 송도(개성)의 옛집으로 돌아가는 운암공을 송원(松原)과 마원(麻原) 사이에서 무참히 살해하니 1398년(태조7년) 9월 15일로 79세의 나이였다.
이 때에 운암공을 마중나갔던 문중 71인이 함께 주었으며, 이를 후일 이방원이 잘못됨을 알아, 공이 살해된지 5일 만에 공의 영정에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그러나 공의 아들 차안경(車安卿)은 좌찬성의 증직을 가지고 온 칙사의 교지를 받지 않고 목매어 자살하고, 그의 부인 평산 신씨 또한 거절하니 공의 영전에서 왕명 불복죄로 참살되었다.
운암공은 조선 단종 때 임금의 명으로 박팽년과 하위지가 차원부 설원기(雪寃記)를 지어 세상의 귀감이 되도록 반포하고자 하였으나 세조 2년 (1456)에 사육신으로, 단종의 복위에 실패하고 주임을 당하여 역적의 글이라 하여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숙종 17년(1691) 단종을 복위함에 사육신도 복위되어, 운암공의 충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차원부의 시호는, 세조 2년(1456) 5월 차원부 설원기를 본세조가 문절공(文節公)이라 내렸으며, 증직은 승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며 문하시중으로서 고려 때 간의 대부(諫議大夫)였다.
오달제
추담 오달제(1609~1637)선생은 현 이충부락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후, 서기 193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으로부터 병조좌랑(兵曺佐郞),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 지평(持平)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던 분이다.
추담 선생은 후금과의 화친을 반대하는 척화파(斥和波)의 성봉으로서 한때 사임을 하고 향리에 낙향 하였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함에 추담 선생도 함께 들어가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화친으로 기울어져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하게 되었으며 당시 청의 장수 용골대는 조정의 척화론자를 볼모를 잡아 데려가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척화 선봉인 오달제·윤집·홍익한 등과 함께 많은 이가 청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서기 1637년 추담 선생은 동료인 윤집·홍익환과 함께 동년 4월에 청의 심양에 도착하여 온갖 고문과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니 동월 19일에 처형이 되었다.
그 후 조선 조정에서는 추담선생과 윤집·홍익한을 일컬어 삼학사라 칭하고 영의정에 추대하였으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라 하고, 광주의 현절사, 홍산의팽열사, 평택의 포충사, 영천의 장엄서원에 제향하게 하였다.
조광조
정암 조광조(1482~1519)선생은 이충부락에서 유년기를 보내셨고,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선생에게 수학하셨다.
서기 1515년 문과에 급제하여 당시의 군왕인 중종의 신임이 두터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표방하였다.
그는 당시 조정에서 호조, 예조정랑(正郞)을 거쳐 경영시독관, 춘추관 주관을 겸임하여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게 되었다.
서기 1519년 승진하여 대사헌 및 세자의 부빈객(副賓客)을 하였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신진학자를 등용하는등 혁신정치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정치는 귀족사회의 질시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연산군의 몰락을 가져온 중종반종 때의 공신책록이 잘못되었다 하여 격하시키는 사건이 발단이 되어 당시 귀족계급인 훈구파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훈구파들은 조광조 선생을 실각하게 하려고 계략을 꾸몄는데 궁중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새겨 벌레가 먹게 하니 왕이 이를 보고 중신들이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모함을 믿게 되었다.
주초위왕을 묶어쓰면 조위왕(趙爲王)인즉 조씨가 왕이 됨이니 아무리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하나 역적으로 되어 그의 일파가 모두 숙청이 되고 조광조는 사사(賜死)되었다.
후일 선조 조기에 조정에서 그 잘못을 인정하고 영의정에 추대하여 능주의 숙서 서원에 제향하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으로 내리었다. 그 후, 약 1800년경에 진위유림에서 조정에 상소하여 유허지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탕
송탄 방혜마을에 오제공(悟齊公) 이탕(李宕)선생의 사당이 서 있고 그의 후손들 중 장자인 이정함(李廷 )의 후손들이 맥을 이어 받들며 근 400여년을 살고 있다.
오제공은 경주 이씨 월성군 이천(李薦; ? 1349)의 8대 손이며, 성균관 진사 이달존의 아들로서 중종 2년(1507) ~선조 17년(1584)까지 동몽교관, 강릉 참봉(정9품), 직장, 평시 서령, 사직서령(종 5품)등을 거쳐 낙향한 인물이며 그가 자리한 곳은 현 막곡마을 뒤편인 사당골이다.
그의 아들은 장자 정함, 차남 정암(廷 ), 삼남 정형(廷馨)이 있고 그의 사후에 그는 이 세 아들들의 영광에 힘입어 의정부 영의정 겸 오산 부원군으로 추종되었다.
경주 이씨 오제공의 후손으로 장남 정함이 관직에 있을시 사당골의 오제공 사당을 장안리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이로써 방혜동의 경주 이씨의 1차적 이동이 있었던 것이다. 정함이 벼슬을 사하고 낙향하여 보니 마을의 지세가 다리미 형국으로 양반이 살기에 안 좋은 곳이라 하며 전 가솔들을 이끌고 현재의 방혜동으로 이주하니 이것이 두 번째 이동이요, 사당 또한 옮겨 모시게 되었다.
현재의 사당은 1960년대에 재 증축한 것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주민은 정함 퇴제공(退薺公)의 후손이며 퇴제공은 자가 백훈(伯 薰)이며 1534년부터 1599년까지 사셨던 분으로서, 명종13년 (1558)에 진사에 합격하여 삼예찰방(종6품)에 올랐던 오제공의 장자로 후일 형제들의 귀(貴)로서, 이조참판(종 2품)에 추증된 분이다.
한편 차남 정암 퇴우당(退憂堂)공은 사류재(四留齋)공으로도 부르며 자는 중훈(仲薰)으로 1541~1600년까지 사셨고 1558년 진사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1578년 양주 목사로서 향교와 도봉서원(道峰書院)을 개축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치적을 쌓은후 1578년 동래 부사를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위하고 개성에 이르고 동생 정형과 함께 성을 수비하였으나 개성이 함락당하자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르자 황해도 초토사가 되었고, 연안에서 왜군 3천명을 대파하여 경기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으며, 1596년 충청도 관철사로 재임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였으나 죄인을 임의로 벌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황해도 순찰사 겸 도순찰사로 임용되고 1597년 정유재란시 황해도 연안을 굳건히 수비하고 사직한후 풍덕에 은거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후에 1604년 연안수비의 공으로 선무 2등 공신 월천 부원군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라 받았으며 이에 따라 부친 오제공도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의정부 좌찬성 오산군으로 추증되었다.
삼남 정형 지퇴당(知退棠)공은 1568년 문관에 급제하고 1592년 임진왜란시 좌승지로서 왕을 호위하여 개성에서 개성부 유수로 싸우고 형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93년 명장 이여송과 함께 평양 탈환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1596년 사도 제찰부사, 계속 이조참판 대사성 대사헌을 역임한후 160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에 다녀왔다.
이후 북인이 득세하고 남인 이원익·이항복 등이 숙청되자 병을 핑계로 양주로 낙양하였다가 1606년 삼척 부사로 재직
이헌방
송탄 모곡리는 전주 이씨 수도군 이덕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고장이다.
군자감 이헌방(軍資監 李憲邦)공은 모곡리의 전주 이씨 중 시조로서, 공의 자는 헌방이고, 관직은 군자감을 거쳐 음목사(陰牧使)를 하였던 분이다.
이공은 조선왕조 제 2대 정종대왕의 7대손인 왕자 수도군 이덕생의 4대손 문등부수 이윤(文登副守李倫)의 차남으로, 1494년(성종 25년)에 출생하여 1540년 (중종 35)에 돌아가신 분이다.
1519년 (중종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이공은 평소 교우가 있었던 조광조 선생이 숙청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조 선생의 유허가 있는 진위로 낙향하였다.
공이 정착한 곳은 장안리 일대였으며, 지금의 모곡리 방향으로 범위를 넓게 잡은 것 같다.
모곡리 마을 입구에는 큰 향나무(높이 10m,둘레 1.5m)가 있으며, 이 나무는 이공이 마을 개척 당시에 심었다고 하니, 수령이 약 470년 정도라 할 수 있다.
공은 비록 장년의 수로 타계하였으나, 그의 손들은 그를 장당동 산30번지의 덕암산 산맥이 내려 감도는 곳에 치장하였으며, 대대로 모곡리 전주 이씨 문중을 이어 오고 있다.
현재 전국 200여 세대 1,000여 명의 손이 있다.
이헌방 공의 벼슬은 정 3품 당하관인 군자감 정이었으며, 이는 통훈대부에 해당된다.
오늘날 공이 정착했던 모곡리 일대는 농공단지 조성으로 공단으로 변모되어 있다.
최수성
신무사옥 때 참형 후 영의정 추증되고 신장1동 묘역부변은 제역(除役) 마을로
•처사(處士)라는 선비들
조선시대에는 산림처사(山林處士)라는 부류의 선비들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변혁의 의지는 있지만 불의한 현실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 재야의 비판세력을 형성했던 선비들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화담 서경덕이나 남명 조식처럼 학식과 덕망에서 크게 추앙받는 인물들이었으면서도, 지식과 덕망을 탐욕과 바꾸지 않고 시대의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처사(處士)들은 권력과 재물보다 삶의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목숨보다 중히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뜻 있는 선비들은 처사(處士)를 꿈꾸었으며, 처사(處士)임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처사는 역사에서 손꼽을만큼 적다.
그 가운데 조선 중기 송탄에서 살았던 최수성은 학식과 덕망이 당대에 크게 알려졌으면서도 처사(處士)로서 의롭게 살다 간 선비였다.
16세기 중반의 진보주의자는 재야 사림(士林)이었다.
이들은 조선왕조 건국을 반대하였던 고려 말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예들로서, 성리학이 지향하는 대의(大義)와 명분(名分)을 목숨처럼 여겼던 부류들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의 사상(思想)은 조선건국의 주체였던 관학파(官學派)에 비하여 관념적이고 보수적이었지만, 여러 차례의 정변으로 국가에 공(功)이 많았던 훈구대신들이 정권을 세습하고 권력형 부정부패를 일삼던 16세기의 상황에서는, 원칙에 충실했던 이들이 진보주의자였다. 그러나 진보(進步)는 항상 핍박받게 마련이어서 16세기 초, 중반에 전개된 사림파의 개혁의 목소리는 훈구파에 의해 무참하게 압살당하였다.
요즘 “여인천하”라는 모 방송국의 사극(史劇)드라마로 잘 알려진 조광조의 개혁은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다.
기호사림(畿湖士林)에 속했던 최수성은 중종 때 개혁의 주체들이었던 조광조, 김정 등과 학문과 사상을 같이하였던 평택지방의 대표적인 신진사류(新進士類)였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원칙에 충실하며,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을 위해 삶을 내던진 처사(處士)였다.
남산과 제역동, 송탄 신장1동은 미군부대 안에 수용된 남산(南山)을 중심으로 제역마을, 남산마을, 목천마을, 구장터 마을이 흩어져있다.
이 가운데 제역(除役) 마을은 이름이 독특해서 눈길을 끈다. 제역(除役)이라는 말은 “역(役)을 면제받았다”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국가나 관청의 특수한 역(役)을 지는 대신 양인(良人)의 의무였던 공역(公役)을 면제받은 것을 의미한다.
이 마을이 제역동(除役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6세기초 기호사림의 존경받는 학자로서 신사무옥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원정 최수성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최수성은 본관이 강릉으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가 진위현(현 평택시)으로 이사한 것은 8세되던 1495년이었다.
조선 전기 양반들은 처가나 외가의 재산상속 등의 이유로 처가나 외가 근처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수성의 경우에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일찍이 기호사림의 터를 닦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조광조, 김정, 김식 등과 학문을 익혔다. 최수성과 5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조광조도 외가가 있는 평택시 이충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수학하며 교유(交遊)했을 것으로 보인다. 최수성은 젊은 시절부터 학식과 덕망 그리고 강직한 의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던 촉망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의 활동은 평택지방 보다는 고향이었던 강릉에서 전개되었다. 젊은 시절 그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로는,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던 한급이라는 인물이 딸을 최수성에게 시집보내 자신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려고 했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수성은 평소 호방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성격인데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성품이 어우러져 출세(出世)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중종 때의 개혁세력이었던 조광조, 김정 등과 빈번히 접촉하였다. 특히 최수성이 제역동 뒤편 남산 기슭에 세운 원정(猿亭)은 개혁세력의 회합장소로 이용되었는데, 이와 같은 태도는 의롭지 못한 현실에는 비판적이었으나 현실개혁에는 방관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현실에 정면으로 맞선 실천적 지식인 최수성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은 당대의 실력자 남곤과 숙부였던 최세절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숙부 최세절은 심지가 바르지 못하고 술수에 능해서 중종 때 권세를 누렸던 심정, 남곤 등과 어울리더니 승지(承旨)벼슬까지 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최수성은 불의한 자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님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보냈다.
해 저문 창강 위에 날은 차고 물결이 절로 이네
외로운 저 배 일찌감치 대어라
밤이 오면 풍랑이 높아지리
이 시(詩)는 훈구파의 시대가 가고 의로운 사림(士林)들의 새 시대가 올 것이므로 차라리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여생을 마칠 것을 권유하는 시(詩)였다.
또 당대의 권세가였던 남곤이, 당나라 때의 시인이며 화가였던 왕유의 망천도(輞川圖)를 얻고 크게 기뻐하며 김정에게 화제(畵題)를 요청하였다.
왕유는 만년(晩年)에 남전지방의 망천(輞川)이라는 곳에 초막을 짓고 벗이었던 배적(裵迪)이라는 인물과 배를 띄워 노닐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이같은 삶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망천도였다.
마침 김정의 집에 놀러간 최수성이 망천도를 보고는 자신이 화제(畵題)를 붙이겠다고 자처하였다.
秋日下西岑 가을 해는 서산에 지고
暝烟生遠樹 어스름은 먼 나무에 피어오르네
斷橋兩幅巾 끊어진 다리에 두건 쓴 두 사람
誰是輞川主 누가 망천의 주인일까
위의 시(詩)는 망천도의 정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듯이 보이지만, 남곤의 정치적 행보와 최수성의 비판적 시각을 감안해서 읽으면 대단히 비판적인 의미를 담고있는 시(詩)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인 “누가 망천의 주인일까”라는 내용은, 정치를 농단하고 사대부의 도리를 저버린 남곤은 결코 망천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남곤 너는 지금은 권세를 누리며 세상을 호령하지만, 역사의 심판은 너를 왕유처럼 망천에서 유유자적하는 만년을 보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최수성만이 할 수 있는 세련되고 멋진 한 방의 펀치였다.
위의 두 편의 시(詩)는 최세절과 남곤을 매우 분노케 하였으며, 최수성에 대해 가슴 깊이 앙심을 품게 되었다.
•살아서는 역적, 죽어서는 영의정
최수성의 나이 33세에 일어난 기묘사화(1519년)는 세상으로 향한 그의 마음을 닫아걸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평생의 벗이었던 조광조와 김정이 죄 없이 사약을 받은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후 최수성은 명산을 유람하며 술과 시(詩)와 거문고를 벗하고, 뜻맞는 사람을 만나면 그림으로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의 학문과 재주 그리고 의로운 자세는 많은 사람들의 동정과 칭송을 받았지만, 불의한 세상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기묘사화(1519년) 후 훈구대신들이 주도한 신사무옥(1521년)에서, 죄가 없음을 세상이 아는 데도 불구하고 최세절과 남곤 등의 모함에 의해 참형을 당한 것이다.
젊은 나이에 뜻을 펴지도 못하고 죽었지만 사람의 인생이란 생물학적인 수명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살아서보다 죽어서의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최수성의 사후 그를 죽인 남곤이나 심정, 최세절 등이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다가 탄핵되는 내용이 자주 눈에 띈다.
반면 최수성은 죽은지 불과 18년이 지난 1538년(중종 33년)에 명예가 신원(伸寃)되었고, 1540년(중종 40년)에는 종1품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1545년에는 정1품 영의정에 추증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와 함께 남산(평택시 신장1동)에 묻혔던 그의 무덤은 율곡 이이의 건의에 이해 성역화되었으며, 무덤 주변 10리 안에 있는 마을의 부역을 면제하고 묘를 관리하도록 조처되었다.
또 그의 증조부 최치운 등 12현과 함께 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고, 강릉의 화동서원에는 정몽주와 함께 배향되는 기쁨을 얻었다.
최수성은 한 시대의 진보를 이끌어 낸 선비였으면서도 평택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없다.
그의 후손들인 강릉 최씨 진위파도 대부분 고향을 떠났고, 원산(猿山)이라고 불렸던 남산은 대부분 송탄 미군기지로 수용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무덤도 70년대 미군기지로 수용되면서 강릉으로 이장하였기 때문이다.
조광조와 김정, 그리고 평택지방의 벗이었던 최자반과 우남양이 만나 시대를 논하고 의기(義氣)를 모았던 원정(猿亭)마저도 지금은 정확한 위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묘를 관리했던 제역마을도 지금은 미군부대 담벼락 한 쪽에 낙후된 마을로 남아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시대를 초월하여 추앙받는 인물에 대한 대접치고는 참으로 초라하다 아니할 수 없다.
-김해규/평택시민신문 2001-06-25 (89 호)
효행 : 원길상/최자반
원길상의 효성
소재지 : 도일리 361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이었던 공은 조선 영조때인 1759년에 태어나 1818년 타계한 분이며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여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던 분이다.
공의 나이 13세에 모친이 병석에 눕게 되자 좋다는 약은 백방으로 노력하여 간병하였으나 차도가 없자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드시게 하여 낫게 되었으나 이도 잠시 뿐 얼마후 돌아가시고, 계모를 모시게 되었다.
송은 계모임에도 친어머니 이상으로 극진히 섬기며 관에 나아가지 않고 수(壽)를 다할 때까지 부모 모시기를 극진히 하여 주변에 칭송이 대단하고, 향리의 어른에 대한 예의가 바르기에 공이 돌아가신 후 진위 유림은 왕께 청하여 효자 정려를 원하니 조선 고종 31년(1894)에 효자정문을 세웠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정문이 쓰러지고 없어져 현재는 그의 선조인 원연과 원사립의 양세 충효정문에 편액을 옮겨 함께 모시고 있다.
최자반 선생의 효성 ·
위치 : 송북동 소골마을 동편
조선 성종때 태어나 중종 14년(1519)에 세상을 떠난 선생은 효자로 알려져 내려온 바, 선생은 수성최씨로서 본래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로부터 40대 손인 최영규(崔永奎)를 시조로 한 집안의 7대손이다.
공의 부친은 최윤신(崔潤身)으로 그 또한 일찍이 진사과에 급제 후 벼슬을 탐함없이 수양하시던 분으로, 후학을 배출함에 일생을 보낸 분으로서 수(壽)를 다하시고 홀연히 타계하였으며, 성종 14년(1483)에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로 벼슬을 받았고 증직은 통정대부 이조 참의였다.
공은 부친이 돌아가시자 진위 동편 소골말 불학산 기슭에 모시고 6년간 시묘를 결심하여, 산막을 짓고 조석으로 부친을 공경하여 애도하였는데, 험난한 산속에 온갖 짐슬들의 위협은 물론 마실 물조차도 먹기 힘들었다 한다.
이후 공은 육년간의 상을 마치고, 움막을 헐고 부친께 인사후 내려갈제 학이 길고 슬프게 울며 하늘로 비상하여 사라지고, 샘이 용출을 끝내고 말라버리니 하늘도 공의 효성을 돌보아 주셨음을 알게 하는 일이었다.
이 때에 학이 살았던 봉우리는, 동실봉이라 하여 학의 먹이인 오동나무 열매가 열렸던 봉우리란 뜻으로 부르고 있으며 공이 개척하고 살았던 마을은 오좌동(梧佐洞)으로 표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은 오좌동을 가꾸어 후손 대대로 번성할 터전으로 꾸미고자 수십주의 은행나무, 향나무를 심었으며 샘을 파서 식수를 개발하고 진위 유림의 사학자들과 교분을 두텁게 가지시다가 기묘사화(중종 14년 : 1519), 신사무옥(1521)이 일어나 친하던 사림 학자들이 처형되자 세상의 덧없음을 통탄하시고 자손들과 후학의 배출을 노력하였으며, 이윽고 수(壽)가 다 되시자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그의 효성을 기리고 그의 손 최희효의 귀(貴)로 정헌대부에 추증하였으며, 묘는 오좌동 선영으로 하였다.
오늘날 수성 최씨는 송탄 전역에 분초되어 살고 있으며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활동하고 있다.
구국의 장군들 : 원균/최유림/원연/이성부/원사립
원균
영화에서 본 원균 모략과 중상 박정희 정권의 의도된 ‘조작’
1.원균에 대한 기억
평소 촌놈 중에 촌놈으로 자부하는 나의 유년의 추억은 5, 60대 아저씨들과 비슷하다.
얼마전 가깝게 지내는 선생님 한 분이 산간 벽촌 출신인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하며 “저는 심지어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자장면을 먹어봤어요”라고 말하기에 나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남들이 들으면 안 믿겠지만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자장면을 먹어봤고, 대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삼겹살이라는 걸 먹어봤기 때문이다.
내가 문명의 혜택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영화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7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동네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동네에서 영화를 보려면, 30리나 떨어진 비인까지 걸어서 10리 버스타고 20리를 갔다와야 했다.
사정이 그렇지만 가끔 동네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학교나 관공서에서 계몽영화를 보여줄 때이다. 대체로 저축이나 반공, 의식개혁과 같은 내용을 주제로 상영했던 이 영화들은 상영한다는 방송이 있게되면 동네사람들은 일지감치 저녁을 해먹고 동네 입구에 있는 공터로 모여들었다.
스크린이 있을리 만무한 마을에서는 큰 소나무에다 하얀 광목천을 쳐놓고 영화를 상영했는데 바람이라도 불면 참 걸작이었다.
그래도 저축과 관련된 어떤 영화는 제법 재미있어서 아직도 내 기억 한 귀퉁이에 남아있다.
내가 모양이라도 갖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시 학교에 “증언’이라는 반공영화를 단체관람하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우리는 비인까지 왕복 40리를 걸어가서 영화를 봤다.
그러고도 우리동네는 학교에서 10리가 넘는 길을 더 걸어와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박물관의 유물만큼이나 오래된 추억이다.
중학교 때도 단체관람으로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가 “성웅(聖雄) 이순신”이었다. 당시 우리의 기억에 하나님 다음으로 위대한 분이 이순신 장군이었으므로 나는 아주 재미있게 그 영화를 봤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순신이었고 나쁜 놈은 원균이었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한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상하게도 왜군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원균의 모략과 중상에 대한 적개심이 더 강하게 솟구쳤다.
이같은 감정이 사실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의도였다는 것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내 유년의 기억에 민족의 간성(干城)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고 민족을 위기에 빠뜨린 역적으로 각인된 원균(元均0을 나는 평택에서 만났다.
그에 대한 관심은 평택지역의 향토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학생들을 데리고 답사도 하고, 가족들과 놀러가기도 했으며, 여러 문헌을 수집하고 검토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원균에 대한 인식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원균에 대한 답사는 그래서 시작되었다.
2.원주(原州) 원(元)씨의 600년 세거지(世居地) 도일동
도일동은 옛 평택시와 송탄의 경계부근에 있다.
평택에서 출발하면 산업도로를 따라 가다가 평택여종고와 쌍용자동차 가는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248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쌍용자동차와 원칠곡 마을을 지나 원곡에서 송탄으로 가는 340번 지방도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좌회전한 뒤 100미터쯤 가다 길 우측에 원균장군 묘(墓)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건너편으로는 평택 특수전문대학 건설현장이 보이는데, 이 곳에서 우회전하여 곧장 달리다 만나는 마을들이 도일동 마을이다. 도일동은 뒷편으로 덕암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앞으로는 도일천을 두고 있으며, 조선시대만 해도 삼남대로가 지나가던 교통의 요지였다.
관(官)과 멀리 떨어진데다 배산임수(背山臨水)에 교통마져 편리한 이 곳을 양반 사족(士族)들이 그냥 지나쳤을리 만무하다. 그래서 도일동에는 민촌(民村)보다는 오랜 역사를 지닌 반촌(班村)이 많다.
도일동은 크게 하리, 내리, 상리로 나눈다. 그렇지만 덕암산 아흔 아홉 구비에 숨겨진 도일동의 작은 마을까지 합하면 숫자를 헤아리기 어렵다.
도일동 아흔 아홉구비 마을의 대성(大姓)은 원주(原州) 원(元)씨이다. 그 중에서 원씨들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사는 동네가 하리(下里)마을이다.
하리 마을의 원주(原州) 원(元)씨들은 모두 합하여 약 80호쯤 된다. 입향조(入鄕祖)는 세종 때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던 원임(1419 – ?)으로 알려져 있다.
도일동의 원주 원씨 가문은 대대로 무인(武人)집안으로 이름이 났다. 입향조(入鄕祖)였던 원임(元任)(또는 원몽이라고도 함)도 세종 때 무과에 급제했던 무인출신이며, 원준량도 홍문관 교리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무인이었다.
원균(元均)은 원준량의 아들이다. 원균에게는 여러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뛰어난 무인(武人)들이었다.
차남이었던 원연(1543-1597)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향리에 은거하다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며, 정유재란 때에는 적성현감을 제수받아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또 셋째 원전은 무과에 급제 한 후 임진왜란 당시 고성현감으로 있다가 원균 부대의 종사관으로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또 원연의 아들이었던 원사립(1569-1610)도 무과에 급제한 뒤 진주목사, 김해부사 등을 지내며, 여진족과 왜군의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원균의 아들 원사웅도 부친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가 칠전량에서 전사하였다.
이처럼 600년 세거(世居)동안 출중한 무인들을 배출한 역사는 마을의 지명에도 베어있다. 하리 마을에는 대마(待馬)거리, 투구봉, 숫돌고개, 갓골(갑골)과 같은 자연지명이 있는데, 대마거리는 말이 기다린다는 뜻이고, 투구봉은 전쟁 때 쓰는 투구를 의미하며, 숫돌고개는 장군이 칼을 갈았다는 숫돌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3.도일동의 원균장군 유적
도일동에서 만날 수 있는 원균장군의 흔적은 묘(墓)와 사당(祠堂), 그리고 보물 제1133호로 제정된 원릉군 원균 선무1등공신 교서(敎書)와 울음밭이라고 하는 생가(生家) 터가 있다.
묘(墓)는 내리저수지 옆에 있고 사당(祠堂)은 홍살문 앞으로 난 비탈길을 따라 여의실로 가는 언덕 위에 있으며, 생가 터인 울음받은 내리 저수지 위쪽에 자리한 안골마을에 있다.
대 여섯 채 밖에 안 되는 안골마을은 워낙 안쪽에 숨겨져 있어서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들어가 보면 이런 마을이 있는가 싶게 안온하고 포근하다. 원균장군의 묘(墓)는 가묘에 가깝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우리 수군이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시체인들 온전히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타던 애마(愛馬-선조임금이 하사했음)가 장군이 전사한 뒤 유품 몇 가지와 한 쪽 팔을 물고 천리길을 달려 고향마을까지 가져온 뒤 죽었는데, 그 유품으로 묘(墓)를 썼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원균장군 묘(墓) 답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초라한 봉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욱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무덤 옆의 축사 때문이었다. 전에 이곳을 답사하게 되면 홍살문을 지나면서부터 축사에서 나오는 침출수 냄새를 맡게 되는데, 이 냄새를 맡게 되면 답사고 뭐고 아무생각이 나질 않았었다.
같은 선무1등공신(功臣)에 책봉되었으면서도 성역(聖域)처럼 단장된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와 비교되던 시절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3공화국 시절 원(元)씨 문중에서 정비사업을 하고 싶어도 서슬 퍼런 정권(政權)에 눈치가 보여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몇 년 전 원(元)씨 집안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비사업이 시작되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성인(聖人)으로 받들어지고 성역화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잘못 평가된 역사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는 점에서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4. 임진왜란과 원균
원균(元均)은 도일동의 무인가문에서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한 전형적인 무인기질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무과(武科)에도 젊은 나이에 급제하였으며, 승진도 순조로워서 조산만호 부령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여진족 토벌에 큰 공(功)을 세웠다.
원균(元均)이 임금과 조정의 신임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동태는 심상치 않았다. 조선도 일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로 당쟁(黨爭)만 더욱 치열해졌다.
그러나 일본의 동태에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던 조정은 남해안 지방의 방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발탁된 인물이 원균(元均)과 이순신이었다. 원균(元均)은 명성에 걸맞게 수군의 요충지였던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았고, 이순신은 원균보다 중요성이 떨어지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원균(元均)은 일찍이 여진족 토벌로 전공이 높았고 무과 급제도 이순신보다 빨랐기 때문에 당연한 조처였으나, 종6품 정읍현감에 불과했던 이순신이 무려 6계단을 뛰어넘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된 것은 파격 중에 파격이었다. 요즘 말로 전쟁 직전의 위기의식과,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이나 정탁과 같은 막강한 빽(?)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승진이었다.
원균(元均)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부임했던 시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불과 두 세 달 전이었다. 당시 조선은 건국 후 2백년 동안 큰 전쟁이 없는 평화가 계속되면서 국방력이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다.
그는 부임 후 군비강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두 세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은 군비(軍備)를 점검하고 기강(紀綱)을 잡는데도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진에 쳐들어 왔을 때 부산첨사 정발은 군병(軍兵)이 모자라 민간인을 모집하여 대항하였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도 마찬가지였으며, 경상좌수사 박홍은 겁이 나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경상우수영에는 불과 네 척의 전함만이 있었다. 더구나 왜군의 막강한 군세(軍勢)에 병사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경상좌수영이 무너지자 원균은 부산과 가까운 거제도의 군량미를 불태우고 관할 내의 장수와 수령들을 요소에 배치한 뒤 한산도로 퇴각한 다음 이순신에게 전문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관할 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출병을 꺼렸다.
이순신이 출병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원균은 왜군과 수 차례의 전투를 치루며 네 척의 전함으로 적선 10여 척을 불사르는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은 전과는 이순신, 이억기 등과 연합함대를 구축하기 전까지 왜군을 거제도에 묶어두는 효과를 거뒀다.
이 과정에서 원균은 이순신에 대하여 감정이 상했을 법도 한데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이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원균에게는 성품이 호탕하고 큰 일을 위해서는 작은 감정을 묻어두는 대범함이 있었다.
이와 같은 성품은 전투에서도 이순신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순신은 전투에서도 생각을 많이 하고, 신중했으며, 전략과 전술에 능한 지장(智將)의 면모를 보였다면, 원균은 용맹무쌍한 용장(勇將)의 면모를 보였다.
여진족 토벌에서도 그랬지만 임진왜란에서도 원균이 즐겨 사용했던 전술은 당파(撞破)작전이었는데, 이 전술은 지휘선이 맨 앞에서 적에게 돌진하여 적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은 후 갈쿠리와 긴 창 그리고 화공작전을 이용하여 적선을 부수는 전술이었다.
원균이 이와 같은 작전을 즐겨 사용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인 판옥선이 왜선에 비하여 견고하다는 이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전술은 튼튼한 전선(戰船)보다 지휘하는 장수의 용맹함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순신과 연합작전을 전개할 때도 원균은 거의 대부분 선봉에서 싸웠다. 선봉의 원균이 적의 배를 깨뜨리며 교란시키면 뒤를 받치고 있던 이순신이 적을 에워싸고 무찌르는 식이었다.
이순신, 이억기 등 전라 좌,우수영과 연함함대를 구축한 뒤 우리 수군은 원균의 당파작전과 학익진(鶴翼陣)으로 대표되는 이순신의 변화무쌍한 전술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그러나 문제는 전투가 끝난 뒤 승전의 장계를 올리는 곳에서 발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검토해 보면 원균은 이순신에게 합동 장계를 올리자고 제안했는데 이순신은 나중에 하자고 미루다가 원균에게 통보하지도 않고 전쟁의 공(功)이 자신에게 있음을 부각시키며 전리품과 함께 단독장계를 올렸다.
이 문제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서로 반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공식석상에서조차 원균은 이순신을 면박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 난중일기에도 원균이 포악하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반목은 어전회의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거론되었다.
조정은 문제의 핵심인 원균을 충청병사, 전라병사 등 내직(內職)으로 전직시켰다. 하지만 조정대신들 중에는 원균(元均)만 문책하는 것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부원군 윤근수가 대표적인데, 평소 원균의 호탕하고 담백한 성품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던 선조 임금도 윤근수의 의견에 지지를 보냈다. 더구나 이순신은 과거 왕이 공격을 명령했을 때 상황이 유리하지 못하다고 출전을 기피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산적도 있었다. 그와 같은 과거를 기억하는 임금은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공적을 가로챘다는 조정의 일부 여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선조30년 4월(1597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서 박탈되어 서울로 압송된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이순신의 공적을 시기하고 권력을 탐했던 원균의 간계(奸計)에 의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역사란 후대 사람들의 평가(平價)의 산물(産物)이라고 했을 때, 이와 같은 평가는 후대 사람들의 악의에 의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원균(元均)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그러나 용맹하고 우직한 전형적인 무인(武人)기질의 원균에게는 정적이 많았다. 집권세력 중에도 유성룡이나 권율, 이원익 등은 원균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이들은 도원수 권율을 통하여 원균에게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즉시 진격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을 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육군과 수군이 함께 연합작전을 할 것을 주장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원균의 생각으로는 수군 단독으로 공격할 경우 적의 협공을 받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원수 권율의 명령은 단호하였다.
출전하면 패전이요, 자신에게는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원균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조선 수구이 궤멸한 칠전량 해전의 패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 전투에서 원균은 아들 원사웅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논공행상의 자리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은 원균과 권율이었다. 조정에서는 원균(元均)의 공(功)은 인정되지만 패장(敗將)이라는 이유로 선무2등공신에 녹공(祿功)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패배는 원균의 책임보다는 무리한 명령을 강요한 도원수 권율의 책임이라는 선조 임금의 적극적인 옹호와 조정(朝廷)의 여론에 의해서 다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1등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원릉군(元陵君)에 봉해졌다.
5.역적(逆賊)인가, 명장(名將)인가
원균(元均)은 역적이 아니라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명장(名將)이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임진, 정유재란의 전공(戰功)을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했던 1603년(선조 36년)의 평가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순신을 역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한 인간의 삶에서 공(功), 과(過)는 있겠지만, 장수로서 이순신은 탁월한 인물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순신을 성웅(聖雄)으로 평가한다거나, 원균을 간웅(奸雄)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역사의 평가는 더함도 덜함도 없는 객관적인 것이어야 참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해규/평택시민신문 기자 2001-02-20 (75~76 호)
최유림(崔有臨)장군
송탄지역 출신의 맹장으로 최유림(1426 ~ 1471)장군이 있으며, 오좌동의 수성 최씨 문증 인물로서 공에 얽힌 이야기가 문중에 전해온다.
공은 자가 자앙이고, 일찍이 학문과 무예에 능통하여, 24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고성 헌령으로 나가셨으며, 의금부 진부를 지내고, 1455년(세조 원년)에 사직으로 좌익원종공신 3등이 되었다.
1464년 중추원 부사로 명받고 진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6년 전라도 처치사로 나갔으나, 1464년 명나라에 갔을 때 사적으로 장사를 하였다 해서 부처되었다. 1467년 5월 회령부사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켜 북방의 관리들을 죽이며 한양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는 귀성군 준을 사도병마도통사로 하여 조석문·허종·남이·강순·어유소 등을 대장으로 삼만관군을 출동하니, 공도 이에 비장으로 참전하여 북청에서의 두차례 격전에 선봉으로 대승을 거두어 출병 6개월만에 개선하였다.
이로써 공은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 3등이 되었다. 이 후 명나라에 이만주(1467 조선건위주의야인 3대 추장)에게 조정에서는 우리의 관직을 주어 귀순하도록 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고 명에 귀의하여 도지휘첨사의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세종임금의 토벌 정책에 위협을 느껴 홍성으로 거처를 옮겨 세력을 가졌다가 압록강의 지류인 파서강 유역에서 명의 국경에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으니, 명나라는 조선의 국경지대이므로 이의 평정을 원하였다.
1467년 세조는 대대적인 야인 토벌대를 국경에 보내어, 명에도 거추장스럽고 조선에도 위협이 되는 이만주의 본거지를 쳐부술 때, 최유림 장군이 따라나가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하여 1468년 병조참판 수성군 에 봉해지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성종2년(1471) 8월에 공이 돌연 병을 얻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고, 왕이 어이를 보내 치료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백약이 무효로 4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성종 임금은 크게 슬퍼하시며 공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안양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진위군 우동에 치장하도록 하였고, 신도비와사당을 세워 후손이 기리도록 하였다.
최유림 장군의 사당은 10여회의 중수후 1980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다시 조성하여 1982년 11월완공 하였으며 향토 유적 제1호로 지정되 있으며 위치는 송탄시 송북동 오좌동 마을의 왕재 좌측이다.
원연(元挻)장군
원연(1543~1597)장군은 자가 광보로서 임진왜란·정유재란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순국한 분이다.
원균장군의 동생으로 156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관직에 나갔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인의 김량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원연장군은 용인전투의 승리로 연기현감이 되었으며 이후 적성현감으로 옮겨 치적을 쌓는다.
적성현감 재직시에 군민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양주진관 병마첨절제도위로 정유재란을 맞아 전투에서 장열히 전사하였던 분이다.
전란이 끝나자 나라에서는 임진창의훈에 들게하고 증직으로 이조참의 적성공에 봉하였으며 1679년에 충절인으로 인정하여 충절정문을 세워 가문의 영광을 보이도록 하였다. 원연장군의 충절정문은 현재 양세충효정문이라 명칭을 바꾸고 송탄시 도원동 도일리 안골마을에 보존되 있다.
이성부(李聖符)장군
도일리 상리 마을에는 이성부 장군의 충절정문이 오랜 세울 풍상에 시달리며 서 있다.
이성부(? ~ 1624)장군은 조선 중종때 태어나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증조부 댁에서 수학하며 무술을 연마한 뒤 1608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비변사 낭관 등을 거쳐 1619년 만포진 첨절제사 훈련원 도정·오위 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인조 2년(1624)에 이괄(1587~1624)이 공신책록에 불만을 품고 변방에서 반역하여 도성을 향하여 진군하니, 평소 무능하고 의심많은 공신들에 대한 불평이 있는 장수들이 합세하여 그 기세가 등등할 제 조정에서는 제찰사 이원익을 파병하고, 이성부 장군을 우방어사로 하여 반한군 진압에 나섰다.
서울로 진군하던 이괄 군은 임진강을 기점으로 관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경기·강원 양도 산로 우 방어사 이성부 장군이 지키던 한강 북방 한탄(恨歎)강변으로 진격하였다.
이성부 장군은 강을 뒤로 한 배수의 진으로 적을 맞아 용전 분투하였으나, 반군의 기세에 패전을 직감하였다.
이에 적장에게 잡히는 것보다, 차라리 패장으로 죽음을 택하여, 자신의 망건과 금침을 종제인 ‘덕영’에게 주면서 증조부께 전하라 이르며 “독자로서 죽게되어 노모에게 불효함이나 옛 물건이나마 남겨 전하고자 한다.”하고 물에 투신할 제 종제가 옷깃을 잡고 도피할 것을 종용하자 칼을 빼어 옷깃을 베고 죽음을 택하였다.
그 때에 건너편 우군의 방어사가 구원하고자 군사를 내었으나 이미 때가 늦었고 반란군은 우군 장수 일곱의 머리를 베어 말에 실어 물을 건너 보냈다. 우군의 방어가 이원익은 이를 보고 칼을 빼어 스스로 피를 내어 맹세하길 “내 이원수를 반드시 갚고야 말 것이다.”하니 휘하 장졸들 또한 그렇게 하며 사기를 팽대시켜 후일 반란을 진압함에 용맹을 떨치게 되었다.
이성부 장군의 충절에 그의 죽음을 들은 인조가 슬퍼하시며 그를 자헌대부병조판서에 푸증하고 향리인 송탄시 도원동 도일이 상리에 충절정문을 세워 그가 충절된 절제인(節祭人)임을 널리 알려 본받게 하였다. 충절정문에는 이성부로 편액이 되어 있으며 ‘을유문화사 간행한국사’에는 이덕부로 되어 있으며, 당시 같은 방어사였던 이 중노와 함께 투신한 것으로 되어있다.
원사립(元士立)장군
원사립(1569~1610)장군은 원연장군의 양자로서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훈련원 주부, 군기사 정을 거쳐 1597년 서천군수로 나가는 동안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천군수로 왜적을 물리쳤으며 당시 부친 원연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적과 싸음에 동요없이 임하였으며, 전란 후 김해부사·진주목사겸 병마첨절제사로 관직을 마친후 향리에 돌아와서야 부친의 상일 지내었다.
부친의 묘소에서 3년간 시묘에 정성을 다하여 문중과 인근 진위 유림에 효자라고 소문이 났으며 장군이 타계한 뒤 200여년만인 1805년 유림의 받듬을 입어 나라에서 봉표치제를 명하고 효자정려하도록 했다.
이에 향리에서는 원연·원사립 부자를 함께하여 양세충효정문을 세우고 받들게 되었다. 이 충효정문은 송탄시 도원동 도일리 안골에 있다.
구한말 민중 운동
1700년대 영·정조 시대를 조선 말기의 황금기라 한다면, 1800년대는 亡國의 비운을 잉태한 혼돈기로 볼 수 있다.
왕권은 악화되고 세도가의 권력 남용은 양반들이 지위를 격하시키는 현상을 가져왔으며 관료들은 부패하여 농민들은 각종 세금과 횡포에 시달리게 되며 지방 향리와 토호들의 세력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는 권력 누수 현상이 일고, 부(富)함이 신분의 첫도자 되어 사회계급의 혼란을 일으켰다.
송탄은 경기도 평택 지방의 당시, 한 郡(진위군)으로서, 1889년 평택·죽산에서 시작된 ‘민란단체 활동이 1890년 수원 이남지역 전체로 확산되고, 1891 진위등지의 도로가 차단되는 지경에 이르며, 이후 10여 년간 소란이 계속되었다.
조정에서는 화적으로 보아 진압하였던 이 사태는 민중 봉기 형태에서 전투력을 갖추고 양반들과 극력한 대응을 했던 셈이, 전라도 지역의 동학 동학 운동과는 그 맥을 달리하며 발생하였다.
그러나 동학란까지는 반봉건적 대정부 투쟁의 범위안에서 원성받는 지방관과 양반 부호의 응정 정도로 보면 된다.
활빈당은 1900년 2월경 충남에서 발원하여, 주로 충청·경기·강원·영호남 등으로 파급되면서 1904년까지 이어지고, 이들은 무장하고 반봉건·반제국주의의를 외쳐 정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투쟁을 선포하고 동학·화적 출신들이 가세하며 ‘자연평등, 빈부타파, 국가혁신’을 하기 위해 활동하고 빈민 구제에 힘을 써서 의로움을 보이기도 하였다.
의병의 활동으로서 송탄은 1896년 경기 이천에서 발생한 김하락 부대의 활동권에 들었으며, 우리 고장에서 배출된 의병장은 문헌에 나타난 바 없으나, 1889년 이후 경기도 소요 사태에 연관된 민중운동은 의병 운동으로 이어져 다수 민중이 참석했으리라 본다.
독립운동
독립운동
1) 3.1 독립 만세 사건
‹‹‹종로에서 여성들의 만세동운
3.1 운동에 있어 송탄 지역의 참여는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에 의할 때, 진위군이 집회8, 참가인원 5,000명, 실종 74명, 부상자 250명으로, 인근 안성·양성·화성 지구와 연계되어 격렬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진위군은 서탄·송탄·고덕·병남·청북·포승·현덕·오성·부용·서면 등 11개 면으로 구성되어 지금의 평택군 범위와 같으며, 송탄시도 당시에는 진위군 송탄면(일탄·이탄면)이 있었다. 진행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3.9> ·현덕면에서 각 동이 일제히 산에 올라 불을 놓고 만세를 부르니 인근 면에서 호응을 하였다.
<3.10> ·오성면 평야 및 산간 지대에서 만세가 있었고, 청북면은 사진리 뒷산과 마루산에서 신포 외 많은 군중이 집합하여 만세를 불렀으며, 한영수씨는 평택리에서 지휘하다 체포되어 서 대문 형무소에서 3년 복역후 별세하였다.
·평택읍에서 만세 선동 격문이 정류소 앞에 붙어 경찰이 경계하였으나, 오후 5시경 역전에 수천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 군문리 다리로 행진하던 중 소방대에서 종을 쳐 경찰이 출동하고 해산을 강요받아 주모자 7인이 체포된 결과를 낳았다.
<3.11> ·평택 정류소 앞에서 시위가 있었고 주모자 14인이 체포되었는데 안종철 외 1인은 14일간 구금되었었고, 학생 안충수외 5인은 학교 교장의 보증으로 석방되고, 나머지 5명은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법에 압송되었다.
압송된 자는 비전리 이상도·목준상 평택리 민응화, 오성면 양교리 한영수 등이다.
<3.16> ·수원 북수리 천도교에서 장날이라 많이 모인 교인들이 서울에서 연락차 내려온 이병헌이 교구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서울의 정세를 듣고 독립 운동비 모금을 의논하였는 데, 일본인과 소방대원이 합세하여 문을 부수고 들어와 안종환·안종린·홍종각· 김상근·이병헌 등이 부상하였다.
<3.21> ·진위면 야막리는 천도교구가 있고 교인이 많았는데, 봉남리 주민과 합세한 5백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3.22> ·현덕면 권관리 천도교인 이민도·이승엽·최이래·최혁대·장용준·이인수·최종환· 이민익·최정래·최우섭 등이 평택 경찰서에 호출되어 취조받은 뒤 석방되었고, 이민도의 아들은 천도교 중앙총독부에서 독립 운동을 하였다.
<3.23> ·고덕면 두릉리 임승팔·고문재·이승기·김유경이 경찰서에 호출되어 김유경에게 안재 홍·이병헌과 연락한 것을 추궁하던 중 1월경 고문재씨가 독립운동금 108원을 서정리 에 서 이병헌에게 준 사실이 발각되었으나, 천도교당 건축비라는 영수증이 있어 무사하였다.
<3.29> ·오산 장날이라 만세 소동이 있었고 주재소 면사무소와 일본인 상점이 파괴되었다.
오산에 사는 이약한은 대한 공화국 혈복단을 조직하고, 충남 논산인 창인식과 같이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화성군 양감면에서 수백 명이 진위군 청북면 율포리 주민과 합세하여 산상에 횃불을 놓고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였다.
<4.1> ·양성에서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를 방화하고, 원곡면 사무소를 습격하였다.
·3.31에서 4.1에 서울에서 결사대가 왔다는 풍문이 있어 안성 경찰서가 비상에 들어가고 평택 경찰서에 응원을 구하였다.
·밤9시경 평택역에서부터 시위가 시작되고, 각처의 산봉우리마다 횃불을 올려 경찰이 발포 하였으며, 자정이 넘어 해산하였는데, 중상 1명, 경상 10명이었다.
이날 밤 팽성에서도 군중이 떼를 지어 평택으로 진입하고, 송탄면 지산리의 이약우는 보통학생으로 선언서를 돌 리며 연락하여 고덕면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평택으로 달려가자, 일본 상인들은 문을 닫고, 공포에 떨었다.
·오성면 안화리 거주 안육만·김원근 등이 주동되어 청북면 백봉리로 가서 최만화·안선 문·황순태·정수만·홍기성 등의 찬동을 얻어 동민을 동원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4.2> ·고덕면에 경찰수비대와 평택 자위대가 출동하여 부근 촌락을 순찰하고 두릉리 안재홍의 집을 수색하자 주민들이 격분하여 만세를 부르며 태동하자, 경찰은 군중에게 발포하여 6-7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서탄면장 윤기선이 주동하여 면서기 한성수를 시켜 각 부락민들을 동원하여 4.3 정오, 면 사무소 앞에 모이라고 지시하였으며 면민 400여 명이 모여 면장의 선창으로 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윤교영·윤대선 등이 격문을 돌리고 시위 운동을 하였다.
<4.3> ·오성면 학현리 주민 김용성·공재록·이사필 등이 주동으로 동민을 동원하여 봉오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4.10> ·팽성읍 장날을 이용하여 비전리 이도상과 합정리 목준상, 오성면 양교리 한영수, 비전리 심헌섭 등이 주동하여 만세를 부르고 시위에 들어갔다.
·서탄면 금암리에서 주민 100여 명이 주재소 습격하였으나, 일경이 총으로 발포하여 무산 되었고, 사리·수월암리에서도 만세 시위 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기 타> ·북면 은산리에서도 봉화를 놓고 정재운·정경순·정문학 등이 주동하여 동민이 동원되어 주재소까지 행진하며 시위하였다.
「효림 정동순의 전기」에 표현된 은산리 만세 운동을 보면 당시 10살이던 그가 어른들의 대열을 멀리 떨어져서 뒤따라 다녔다고 하며, 밤에는 횃불을 들고 행진하였다고 한다. 일본 군대가 들어와 한 집, 한 집을 돌며 부모들을 연행하는데 모두 60-7-여 명의 장정들 이 연행될 시 반항하는 남자들은 현장에서 총검에 찔려 죽었다고 하였으며, 2~3일 후에서 연행되었던 사람중 주모자 외에 풀려나왔는데 “OO네집 아들은 걷지 못한다.”는 것이라든 가 “OO네 아버지는 귀머거리가 된 것 같다.”라는 소문이 무성하였다고 한다.
2)양성·원곡면의 시위와 송탄
송탄 칠원리는 안성군 원곡면, 평택시 월곡동과 연계하여 있었으며, 경부 국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삼남 대로가 지나는 마을로 상업이 발달한 곳이어서 독립 운동 당시 이웃 원곡·평택의 시위에 참여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양성·원곡의 3.1운동 사건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한국 독립 운동사 연구에 있어서 원곡면 일대의 독립 운동은 그 비중이 매우 크게 취급되고 있다. 이는 운동의 성격이 조직적 폭력 항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1> ·양성의 덕봉리 주민 200여 명이 오세경·오관영 주도로 양성주재소를 파괴하고, 양성 공 립 보통 학교에 모였으며, 원곡에서 이동해 온 주민과 합세하였다. 또 산정리·도곡리·추곡리·주민도 밤 9시경 합세하였다. 주동자는 내가천리 이덕순·최 은식, 외가천리 이근수·이희룡, 칠곡 이유상·홍창섭, 죽백히 이양섭 등이었으며, 이유상 은 서당의 훈장으로 3.28~31까지 원곡면 내가천리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4.1에 모이라 고 지시한 사람이다.
4월 1일 원곡면에 모인 주민을 홍창섭 등이 선동하여 조선이 독립국 임을 선포하고, 일본 관청 파괴, 일본인 축출을 위해 무장해야 함을 역설하였으며, 이어 해산중인 양성 주민과 합류하여 2천여 군중이 주재소에 투석, 방화하고 우편소를 파괴하 였으며 전선을 전달하고 일본인을 습격하였다.
<4.2> ·원곡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평택역으로 가는 경부선 철도의 침목과 핀을 뽑아 일본 수비대의 습격을 지연시켰으며, 안성과 양성을 잇는 다리를 끊어 대비하였다.
일본은 4개 부대로 검거반을 나누어 4.2.~14까지 수원·안성지역에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으나, 원곡면의 주민들은 일경의 도착지연을 틈타 대부분 대피하였으나 그 피해는 적다고 할 수 없으니, 검거 361, 부상·사망 7, 현장사망 3, 투옥 127, 가옥소설 9등이었으며, 옥에 갇힌 자 중 9명이 순국하였다. 송탄인으로 이 운동에 주모자로 활동했던 사람은 이유일·이승익·이화영 씨 등이었다. 현재 안성군 원곡면 칠곡에 3.1 독립운동 기념탑이 서 있어 당시 격력했던 시위를 보여주는 듯하다.
독립운동가 : 이승익/안재홍/이약우/원제승/이유길·이화영/홍광식
이승익(1886. 10. 14 ~ 1942. 4. 17)
이승익은 송탄시 칠원리 사람으로,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180번지에 살면서, 1919. 3. 1 독립만세가 전국으로 확산될 즈음에 안성군 원곡·양성면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던 분으로, 자는 공삼(公三)이다.
3월 28일 이수근 등과 함께 안성군 원곡면 사무소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4월 1일 1,000여 명과 함께 원곡면 사무소에서 시위에 들어가 일본인 면장을 끌어내고 선두에 내세우라고, 양성면으로 횃불 행진하여 시위를 끝내고 돌아가던 양성면과 합세하여 양성주재소를 습격 방화하고 우편소의 집기를 끌어내어 방화하였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잡화상과 거류지를 파괴하였다.
또한, 양성면 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다음날 원곡면으로 돌아와 면사무소 파괴 방화함에 주동이 되는 동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진압경찰에 동료 126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경성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21년 1월 22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죄목은 보안법 위반·건조물 방화·소요범이었다.
그는 옥고 후 향리에 돌아와 그 후유증으로 병석에 누워 1942년 4월 17일 해방을 눈앞에 두고 서거하였다.
조선 1대 군왕인 정종의 일곱째 왕자 수도군 이덕생의 19대 후손인 그는 전주 이씨 수도군파의 향리인 송탄시 모곡리 선영에 묻혔고, 부인 화순최씨 (1923년 後)와 함께 합장되어 1980년 대까지 내려오다가 농공단지가 모곡·가재리 일대에 들어서게 되어 후손이 거주하는 경기도 여주군으로 이장되었으며, 그의 독립유공은 1980년 광복절에 대통령 표창으로 받들게 되었으며, 1984년 묘비를 국가 지원으로 세웠으나, 이 또한 묘의 이장과 함께 여주군으로 옮겼다.
독립운동가 : 이승익/안재홍/이약우/원제승/이유길·이화영/홍광식
이승익(1886. 10. 14 ~ 1942. 4. 17)
이승익은 송탄시 칠원리 사람으로, 안성군 원곡면 외가천리 180번지에 살면서, 1919. 3. 1 독립만세가 전국으로 확산될 즈음에 안성군 원곡·양성면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던 분으로, 자는 공삼(公三)이다.
3월 28일 이수근 등과 함께 안성군 원곡면 사무소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4월 1일 1,000여 명과 함께 원곡면 사무소에서 시위에 들어가 일본인 면장을 끌어내고 선두에 내세우라고, 양성면으로 횃불 행진하여 시위를 끝내고 돌아가던 양성면과 합세하여 양성주재소를 습격 방화하고 우편소의 집기를 끌어내어 방화하였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잡화상과 거류지를 파괴하였다.
또한, 양성면 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다음날 원곡면으로 돌아와 면사무소 파괴 방화함에 주동이 되는 동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진압경찰에 동료 126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경성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21년 1월 22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죄목은 보안법 위반·건조물 방화·소요범이었다.
그는 옥고 후 향리에 돌아와 그 후유증으로 병석에 누워 1942년 4월 17일 해방을 눈앞에 두고 서거하였다.
조선 1대 군왕인 정종의 일곱째 왕자 수도군 이덕생의 19대 후손인 그는 전주 이씨 수도군파의 향리인 송탄시 모곡리 선영에 묻혔고, 부인 화순최씨 (1923년 後)와 함께 합장되어 1980년 대까지 내려오다가 농공단지가 모곡·가재리 일대에 들어서게 되어 후손이 거주하는 경기도 여주군으로 이장되었으며, 그의 독립유공은 1980년 광복절에 대통령 표창으로 받들게 되었으며, 1984년 묘비를 국가 지원으로 세웠으나, 이 또한 묘의 이장과 함께 여주군으로 옮겼다.
안재홍 (1891~1965)
안재홍은 두릉리 출생이며, 비교적 중농인 집에서 태어난 그는 7세때 포승면 홍원리 박재봉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1907년 고덕면 율포리의 진홍의숙에 입학하여 신문학을 배웠으며, 수원의 기독교 계열 학교에 진학한 후 서울의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 전신)의 중학부에 진학하였다.
이 때부터 애국 계몽 운동에 눈을 뜬 그는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미국으로 떠나고자 하였으나 이상재와 부친의 권유로 동경에 유학했다.
1년간 아오야마 학원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1911년 9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여, 언론과 독립운동에 가담하던 그는 1913년 중국을 여행하면서 박은신·신규식·신채호 등의 독립 운동가를 만났으며, 당시 이들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란 조직에 가입하였다.
1915년 귀국하고 서울 경성 사립 중앙 학교 학감으로 제직하며 학생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다가 일경의 탄압으로 사임하고 1917년 중앙 YMCA교육부 간사로 근무하였으며, 본개 기독교인 그가 그 해에 대종교에 가입함으로써 독립 운동에 점차 정진하게 되었다.
1919년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되자 그의 생가인 고덕면 두릉리 일대는 일경의 요시찰 지역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주민과 충돌하는 유혈사태가 빚어졌으며, 안재홍·이병헌을 축으로 하는 독립 운동의 맥은 고덕·양감·우정면 등에 활발하였다고 본다. 대종교의 지방 지도에 연계시킨 일경의 안재홍·이병헌· 등의 감사는 두 분의 영향력을 말해 주는 것으로 전기한 만세 사건 일지를 보면 잘 나타난다.
1919년 4월경 상해를 다녀온 연병호·송세호가 이병철과 함께 청년 외교단을 구성할 때,안재홍은 총무로 참여하여 상해 임시정부 지지와 독립 운동 자금, 인쇄물 살포 등을 획책하고 6월경 경성부 수은동 3번지 안모씨의 집 등으로 전전하며 청념 외 교단 40여 인원을 확정하고 전국적 활동에 들어간다. 그 해 8월 상순 , 총무 안재홍·이병철 양인은 이종욱을 상해로 파견하여 임시 정부 국무 총리 이승만에게 건의서를 제출하고, 청년 외교단 명의로 현금 550원을 독립 자금으로 헌납하였으니, 이돈은 이병철이 350원, 송세호가 200원을 제출한 데 의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후일 6개 월간 대전 감옥에 복역됨)
1920년 3월 5일자로 창간된 조선일보 논설 위원으로 있게 되어, 언론을 통한 그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도움이 되었으나, 전년 11월 총무 이병철이 경상 북도 도경에 체포된 여파에 의해 동료들과 함께 12월 29일 청년 외교단 사건으로 체포 구금된 후 1922년 3년형 언도에 의해 대구 감옥에서 있다가 만기 출옥하였다.
심한 고문의 휴유증으로 1년간 집에서 요양하고 1924년 다시 민족운동에 나서 1924년 최남선의 시대일보 창간에 논설위원으로 참여하고 동년 9월 조선일보 주필이 되었다.
1924년 11월 19일 민족지 사회부 기자 20여 명이 철필 구락부라는 언론 단체를 결성하고 ‘철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는 한편, 1925년 2월 5일 최초의 신문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전조선 기자대회를 개최하고자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때 안재홍은 서무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에 나섰다.
1925년 4월 15일 서울 천도교 기념관에서 전국 20여 신문, 잡지사 기자 700여 명이 참석하여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구해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5개 조항의 결의문을 채택한 전조선 기자대회가 열렸고, 이 때 이상재가 회장으로 안재홍은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그 해 9월 조선 사정 연구회에 참여한 안재홍은 민족 실력 양상 운동에 협력하여 물산 장려회의 자금을 대는 일을 추진하였다.
또한, 신흥우·이상재·윤치호 등 유지 20여 명과 화합하여 태평양 문제 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결사 조직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7년 조선일보 발행인으로 활약하면서 신간회(新幹會)활동에 관여하였다.
신간회는 1927년 1월 민족 단일당 민족 협동 전선이란 표어 아래 계획되고 2월 15일 창립한 단체로,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사회 두 주의자가 제휴한 공동 전선이었고, 합법적 결사 운동으로 비타협적 투쟁을 강행하는 민족 운동의 대표단체였다.
조선일보 간부 신석우 등이 주동하였으며, 전개 방법으로 영남·호남 지방 재벌을 회원으로 망라하여 자금을 조성하는 한편, 국외의 민족·공산주의 운동가들을 망라한 운동으로 민족주의를 표방한것인데, 일제는 문화정치의 회유책으로 승인함으로써 지하조직 조장을 방비하는 의미를 얻어 묵인한 것이라 하겠다.
신간회 발기인으로 안재홍은 34명에 포함되었으며, 발족 총회를 통해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간사 35명이 선임되고, 간사회를 통해 총무부에 안재홍이 총무 간사로 임명되었다.
1929년 신간회 통계를 보면, 전국 138개 지회 3만 7천 명의 회원을 두고 조선 민족의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추구하는 정책을 표방하였다.
1928년 1월 이관구가 집필한 사설 ‘보석 지연의 희생’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안재홍은 금고 4개 월 형으로 2차 옥고를 치르며, 이어 5월에 집필한 사설 ‘제남 사건의 박상관’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고, 금고 8개 월의 형을 받아 3년간 투옥이 되었다.(제남사건의 벽상관:일본이 중국 침략의 일환으로 산동 지방에 출병한 것을 외국의 예를 들어 비난한 것)
1929년 1월 출옥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으로서 생활 개선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 해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주최로 민중 대회를 개최하려다 구속되었으나 기소 유예로 풀려났다.
1930년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민족운동이 거의 불가능할 즈음 조선상고사 관견(朝鮮上古史管見)이란 연제물을 신문에 실어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발표하였으며 1931년 조선일보 사장이 되어 1931년6월~1932년5월 까지 중국 여순감옥에 복역하던 신채호의 한국사 관계 원고를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등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32년 3월 ‘만주 동포 구호 의연금횡령’이란 조직의 혐의로 구속되고 옥중에서 조선일보 사직장을 강제 사임당하고 8개 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조선일보 논설 위원에서 사장직까지 역임하는 동안의 안재홍은 사설 980편, 시평 470평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4년 동아일보에 ‘구월산 등람기’를 연재하고 정인보와 함께 다산 정약용의 문집인 ‘여유당 전서’를 교정하여 간행하였으며, 다산에 대한 연구 논문을 신조선에 발표하였고 조선학 운동을 선도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의 객원이 되어 민세필담·조선신문 소사를 연재하였다. (조선일보는 1940년 8월 10 중단될 때까지 무기정간 4회, 압수 414회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1936년 중국 항주의 군관 학교 항공과에 청년 2명을 양성시키려고 밀파하였다가 발각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1년 6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 1938년 홍업 구락부 사건으로 재구속되어 3개월만에 출감하였는데, 군관 학교 학생 사건의 잔여형기로 인해 다시 수감되었다가 6개월 복역후 출감했다.
1939년 고향인 고덕면 두릉리에 돌아와 칩거하고 자신이 연구하던 조선 상고사와 조선 철학을 집필하며 지냈으나,
1940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를 조사, 주시하던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1942년 12월경 조작된 조선어 학회(우리말 큰사전 간행)사건에 관련자로 체포되어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함남 홍원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의 나이 55세 때인 1945년 8월 옥중에서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제 식민지 시대를 통해 9차례나 옥중에 있었던 안재홍은 해방후 국내 정치인으로서 건국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약을 시작하였으며, 신민족·신민주주의 통일 독립 민족 국가 건설을 목표로 참여하였고, 건국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을 바로 사임하고 조선 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그의 정치 행적을 보면 1945년 9월 24일 조선 국민당에, 1946년 3월 한국 독립당으로(훈련부장),
1947년 9월 민주 독립당에 참여 하는 등 그의 이념 실현을 위해 좌충우돌하는 행동을 보였으며, 좌·우익을 막론한 중앙당적 정치노선을 표방하였다. 그가 건국 준비 위원회에서 나와 1945년 9월에 창당했던 조선국민당은 신민족·신민주주의 이념과 중도우파적 건국 이념을 가진 것으로서, 당시 좌·우익의 극렬한 대립에 그의 논조는 1920년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일제 문화 정치에 타협된 우를 범한 것을 비판하고 극우노선의 탈피를 말하며, 좌익은 극좌익으로서 가지는 모순성을 피하여 한민족으로서의 타협적 이데올로기 창출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좌·우 양쪽에서 공동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47년 남조선 과도정부의 입법위원을 거쳐 민정장관을 지냈으며,
1948년 5월 10일 선거 후 사임하였다가 중앙 농민 학교를 경영하면서,
1950년 5월 30일 제 2대 국회 의원 선거 때 그의 고향 평택군에서 무소속 출마하여 무려 9명의 후보중 최고 득표(14,549표)로 압도적 승리속에 국회에 진출하였다.
당시 외지 인사로서 반공연맹 소속인 최규설 후보는 안재홍을 중립정객으로 호되게 매도 하였으나, 항일지사요 미군정시 장관이었으며 郡의 유일한 인물인 안재홍에 대한 군민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그해 6.25 동란이 일어나고 전화의 와중에서 실종되었으나, 후일 납북된 것으로 밝혀지고 1965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약우(1903. 1. 11~1978)
이약우는 건지마을 출생으로, 호는 만우재(萬遇齋)이다.
본래 충청도 단양에서 이주하여 세거했다는 건지마을의 경주이씨 문중에서 비교적 중농이라, 일찍이 학문을 대하였던 이약우는 그 지혜가 뛰어났고, 한학에 능하였다고 하며, 현대 지식의 습득을위해 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대하던 중, 3.1독립 만세 운동이 있었고 당시 청년 활동에 과감히 뛰어들었던 그는, 선배 이병헌씨의 영향을 받아 3.1 운동의 주동인 33분의 회합시 학생 신분으로서 대기하던 33인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1일 독립 운동이 평택 지역에서 일경의 탄압에도 극력하게 일어나자, 학생의 신분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평택·서탄 등지에 나눠주며 참가를 독려하였다.
진위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좁혔던 지식인으로서, 평소 농촌 계몽과 개발에 뜻을 펴고자 수원 보통 농림 학교(현 수원 농림고)에 진학하였다.
농림 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향리에서 양묘(묘목)업을 전개하고, 헐벗은 국토를 가꾸고자 경기조 양묘 사업소 지정을 받아 운영하면서, 사업소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징용을 면제받게 하여 인근의 젊은이들을 구하여 주었으나, 실제 그의 3남 1녀 중 장남 상복, 차남 상묵씨를 징용에 보내게 된다.
결국 위의 두 아들은 전쟁후 돌아오지 않았으며, 1932년에 낳은 상표(60세)씨가 집안의 맥을 잇게 된다. 그의 해방될 때까지 사업인으로 일제 감시하에 치산치수에만 힘을 썼으며 은밀한 구국 계몽 활동만 하였고, 해방되자 서울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감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정인보·최중상 주동, 이시영 중재) 본래 명예를 멀리하던 그는 얼마 안 되어 활동은 그만두고, 1948년 정부 수립때까지 양묘 사업에만 열중한다.
그러나 평소의 애국 의지는 그를 정치에 끌어내어 한때나마 한국민주당·민주당·신민당 등의 야당 활동을 하게 되며, 1970년에 이르러서야 정계에서 떠나 향리에 머문다.
1971년 장남 상표가 서울에 정착하고 금·은상을 운영함에도 고향 그의 집에 있었으며, 1978년 76세로 숙환에 의해 타계하였다.
그가 살던 건지미의 집은 사촌 형제가 거주하는데, 한옥으로 외벽에는 그가 썼다는 휘회가 새겨져 있으며, 그의 묘소 소골 우리편의 낮은 산자락에 부인 단양 우씨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그가 비록 국가에서 인정하는 독립 유공자는 아니지만, 인근 주민이 인정하고, 3.1독립 운동 비사 (이병헌 저)에 그의 활동이 고증되는 만큼 후손들의 기억속에 잊혀지지 않는 인물로 전할 것이다.
원제승(1844~1935)
원주 원씨이며 도일 리가 향리인 그는 한학자로 조선 말기에 현대 교육을 받은 인물로서, 조선 광복군의 이청천 장군과 무관 학교 동기생이라 전한다.
일찍이 한정부 주사를 거쳐 송탄면 2대 면장으로 있게 되는 그는, 일경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호걸로서 거물 면장이란 호칭으로 일컬어졌다.
1919년 독립 운동 당시 송탄 면민은 대거 참여하여 만세 시위를 하였고, 특히 진위·안성·평택에 연계되어 사상자나 체포된자가 많았다 한다.
그러나 송탄 면장으로서 그의 활약으로 많은 사람들이 풀려나 문헌상으로도 3.1운동의 피해에서 송탄면소 내의 사람들의 기록은 거의 볼 수 없다.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에 협력하고 자신의 영달을 꾀하였다고하나, 그는 일본인들을 이용하고 주민의 편에 섰던 면장으로서 주변에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1935년 숙환으로 타계하여 도일리 선영에 안장되고, 송탄시의 옛모습인 면의 2대 관맥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이유길(1845~1936)
이화영(1880~1961)
경주 이씨 이유길과 그의 당질 이화영 두분은 3.1 운동 당시 안성군 원곡면 독립 운동의 주모자 127분 가운데 들며,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했던 독립유공자였다.
이유길은 본래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120번지에 살면서 3.1독립 운동시 주모자로 체포되어, 1920년 3월 22일 삼년형을 받아 옥살이한후 일경의 감시하에 1925년 도일리 신촌마을로 이주하여 살다가 1936년 72세로 타계하였으며, 그의 후손인 차남 이규홍씨가 향리를 지키고 1977년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묘는 우너곡면 내가천리에 있다.
이화영은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104번지에 살면서 이유길 공의가르침을 받으며 독립 만세에 가담하였고, 옥살이 후 이유길 공과 같이 신촌으로 이주하여 수학에 전념하시며 살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3.1 독립운동 33인의 한 분인 이갑성씨와 친분이 두터워 수차례 정치 참여를 권유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1961년 수를 다하였으며, 자는 경백이고 1977년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고, 그의 묘는 이유길 공과 같이 내가천리 선영에 모셔졌으며, 후손으로 장남 이종선씨가 향리를 지키고 있다.
홍광식(洪光植 :1894~1950)
홍광식은 풍산 홍씨 문경공파의 12대 손으로서 중시조 문경공 홍익상(조선 선조때 문신)의 사남, 홍영(인조때의 문신)의 11대 손으로서 홍영으로부터 추만공파보로서 내려온다.
왕실·독립운동가와 인연으로 일정 시대 초기에 이씨왕가의 재정 관리 기관인 이왕직 소유의 진위군 일대 땅들의 관리를 그의 문중에서 하게 되어, 대지주로서 많은 소작농을 거느리면서도 인근에 인심을 잃지 않았으며, 왕가와 관련으로 일제의 탄압도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1919년의 독립운동 당시 안성·평택 등지에서 피하여 온 독립 투사들은 홍광식씨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에 은신하고,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과도 은밀한 연결이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그는 병점에 있는 융·건능의 관리를 맡아 보다가 6.25의 와중에 타계하였다 한다.
문학기행 : 최경/박석수/이규황
최 경
고등학교 교과서에 안견과 나란히 등장하는 조선전기 대표화가
1.신분제 사회에서 하층민이 출세한다는 것
“난세에 인물 난다”는 말이 있다. 지배체제가 한 번 굳어지면 피지배층이 지배층이 된다는 것은 거의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구조가 고착화된 요즘에도 그렇지만 계급중심의 봉건사회에서는 더했다.
그래서 가난한 민중들이나 핍박받는 민중들은 혼란기에 꿈을 꾼다. 혼란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가능성”이라는 날개를 달고 오기 때문이다.
고려 무신정권기에 신분해방을 꿈꿨던 만적이 그랬고, 조선 말기에 봉기한 동학농민군들이 그랬다. 하지만 조선 전기사회는 하층민이 꿈을 꿀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건국 후 60년이 넘어서면서 지배체제는 자리잡혔고, 지배층은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배층은 학문적, 신분적인 프라이드가 무척 강했다.
그들의 틈새를 비집고 신분상승을 꿈꾸는 것은 고행을 감내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현실에서도 신분상승의 꿈을 이룬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눈에 띄는 인물이 세종 때의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아산의 기녀(妓女) 소생으로 부산 동래의 관노비(官奴婢)였다. 노비신분임에도 축성, 제련 등 과학적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세종에게 발탁되어 노비신분에서 벗어났다. 노비에서 벗어난 장영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세종 때의 과학적 성과들이 대부분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업적만큼 벼슬도 높아져 상호군(上護軍)이라는 높은 벼슬을 누렸다.
하지만 지배층은 이런 장영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왕이 타는 수레를 잘못 만들어 부서지게 하였다는 작은 죄목으로 파직을 시키고 장형(杖刑)에 처했기 때문이다.
장영실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최경(崔涇)이 그런 사람이었다.
최경은 안견과 함께 세종, 세조, 성종 때 활약한 화가이다.
안견이 산수에 능했다면 최경은 인물화에 능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는 염부(鹽夫)의 자식으로 그림에 능해서 화원이 되었던 인물이다.
장영실이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출세를 했듯이, 최경도 그림이라는 능력으로 크게 출세하였다. 장영실처럼 최경도 지배층의 견제와 질시를 뚫고 지배체제에 편입된 인물이다.
그러한 최경(崔涇)의 묘(墓)가 평택시 도일동에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원주 원씨뿐인 이 마을에서 수성 최씨의 묘역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지만 분명 묘비에는 최경(崔涇)이라는 글자가 뚜렷하다. 2
.화원(花園)으로 당상관에 오르다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했던 도화서(원)가 설치된 것은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였다. 도화서의 정원은 20명으로 책임자인 제조는 예조판서가 겸직했고, 그 밑으로는 종6품의 별제가 있었는데 이 직책도 사대부 중에서 맡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화원(畵員)이 되어도 제대로 된 관직은 맡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대우받지 못했던 화원(畵員) 중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이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그렸던 안견이었다. 안견은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을 역임했는데, 이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크 맥과이어의 70개 홈런이 불과 2, 3년 만에 베리 본즈에게 깨졌듯이 안견의 기록도 비슷한 시기의 최경에게 쉽게 무너졌다.
최경은 출신부터가 모호하다.
실록에는 “안산지방의 염부(鹽夫)의 자식인데 어려서부터 그림에 출중한 재능을 가졌다”고 기록되었다.
실록의 다른 기록을 보면 최경이 출세한 뒤 스스로 출신을 감추려고 했다지만, 출신과 계급을 분명히 했던 조선시대에 이 기록은 정확하다고 할 만하다.
조선이라는 계급사회에서 염부(鹽夫)의 자식으로서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장영실이 관노(官奴)의 신분에서 출세하였지만 그것은 예외 중의 예외에 속하였다.
최경은 어려서부터 화원(畵員)을 꿈꿨을 가능성이 많다.
실록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놀면서도 소의 채찍으로 땅에다 인물이나 동물의 형상을 그렸는데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은 “이 아이는 그림으로 출세할 자이다”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뛰어났던 그의 재능은 중앙에까지 알려져서 도화원의 생도가 되었다. 생도가 되면서 최경은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화원의 업(業)에 정진하여 여러 번 승진을 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인물화는 화원 중에서도 출중하였다. 그래서 세종 비(妃)였던 소헌왕후와 세조의 어용을 그리는 기회를 잡았고 그 후에도 예종과 덕종의 어용까지 그렸다.
왕의 어용을 그리는 것은 화원으로서 당대 최고임을 인정받는 일이었고 그에 따른 명예가 주어졌다.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그의 관직은 성종 때가 되면서 벌써 안견의 수준을 뛰어넘어 사대부들만이 제수받을 수 있던 도화원 별좌가 되었다.
별좌는 도화원을 책임지던 2명의 별제 중에서 대표자였으며, 여기에 화원(畵員)을 선발할 수 있는 제거(提擧)라는 직책까지 받았다.
성종 3년에는 역대 왕과 왕비의 얼굴을 모사하였다는 공로를 들어 당상관을 제수하였다.
하지만 출신이 비천한 화원이 당상관에 오른 것을 사대부들은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사간원이 당장 문제삼고 나선 것이다. 왕도 더 이상 최경을 감쌀 수 없어 승직(昇職)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최경에 대한 성종의 애정이 지극했던지 성종 21년 9월(1484)에 끝내 절충장군 사과(司果)라는 서반직으로 당상관에 승직을 시켰다. 이로써 최경은 화원으로서 유래없이 당상관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성종의 최경에 대한 총애는 특별한 인연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성종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구중궁궐에서 냉철한 어머니 인수대비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성종은 아버지 덕종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형님인 월산대군의 집에서 아버지의 영정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 그림은 최경이 그린 것이었다.
그림 한 장으로 성종은 최경이라는 사람을 고마운 존재로 기억하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최경이 정치적으로 출세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3.그의 후손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원출신의 화가로 안견과 함께 최경을 들고 있다.
상, 하권을 합해서 500쪽이 안 되는 교과서에 이름 석자가 올라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만큼 그의 능력은 출중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는 능력보다 신분이 우선이었다. 그가 아무리 당상관까지 올랐어도,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어도 사대부들은 그에게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고 했다.
실록에는 그가 권력을 탐하고 아첨을 일삼았다고 전한다. 또한 출신의 미천함을 가리기 위하여 부모, 형제를 외면하고 명문가의 자손임을 떠벌린다고 적고 있다. 물론 출신의 미천함은 그에게 커다란 콤플렉스였겠지만 이와 같은 내용은 지나친 폄하(貶下)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경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시기는 대체로 세조 때라고 알려졌는데, 이주 동기도 그와 같은 신분적 한계에서 벋어 나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처음 자리잡은 동네는 현재 묘가 있는 도일동이라고 판단되는데, 왜 하필이면 도일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뒤 그의 후손들은 최경이 콤플렉스를 벗어 버릴 만큼 크게 성장했다.
송탄시사에 보면 최경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평택지방 수성 최씨 양 계보인 안양공파와 가산공파를 이루었다.
안양공파의 파조(派組)는 잘 알려진 것처럼 세조 때 인물인 수성군 최유림이다. 그는 세종 32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원종공신 2등에 올랐고, 나중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공신 3등에 녹훈되었으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까지 올랐던 인물로 수성 최씨가 내세우는 최고의 인물이다.
또 그의 아들 최자반은 오좌동 뒷산에 모정을 짓고 조선 전기 평택지방의 큰 인물이었던 최수성, 우남양, 조광조 등과 교유하였던 사람으로, 평택지방 성리학의 대표적인 학자 중에 한 명으로 짐작되는 인물이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통하여 나를 비춰본다(가르친다)”는 뜻의 이 말은 역사적 인물을 답사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물답사는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를 공부하는 과정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를 배우는 과정이다. 글을 맺으며 나는 최경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김해규/평택시민신문 기자 2001-11-26 (108 호)
쑥고개를 위해 태어난 작가- 박석수
소박
-쑥고개·2-
한반도의 어둠을 몽땅 실어다
부려놓은 마을에서 누이야
너는 갇힌 곤충처럼
슬픈 더듬이를 흔들며
아름다운 모국어로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한 시가 읽고 싶다고,
몸은 비록 미군의 품안에서
달러로 길들여져 가더라도, 가슴은
아름다운 모국어로
사랑을 노래한 시가 읽고 싶다고,
그러다가 결혼해서
달러를 따라 마음을 등지고
손 흔들며 떠나던 누이야.
가서는 시집살이 3년을 반도 못 채우고
더 큰 어둠으로 되돌아 온 누이야.
오늘 네 손끝에서 타고 있는
양담배 한 개피가
아름다운 모국어로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지 못하는
내 가슴을 태우고 있다.
노을
-쑥고개·4
마음은 철도망 속 휘파람
소리 일찍 저물고
저문 들녘에 무거운 정적 속에서
구중의 땅 밑을 헤매던
누이의 눈물은 피가 되었다.
왕복 엽서처럼 구겨질대로 구겨진
누이의 눈물은 피가 되었다.
철수하는 미군의 가습이나
태평양이나 아메리카로도
닦여지지 않는
누이의 눈물은 피가 되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한반도의
가장 참혹한 노을이 되었다.
1949년 쑥고개(송탄)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수원에서 보낸 박석수는 짧은 생애동안이지만 거의 고향을 떠나 지냈으면서도 결코 쑥고개를 잊고는 한시도 살 수 없지 않았나 싶다.
앞에 소개한「쑥고개」연작시는 물론 몇 권의 소설집 모두에서 고향을 배경으로 기지촌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쑥고개(송탄)는 한 시대의 역사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는데, 그의 작품 곳곳에는 그러한 그림자가 더욱 비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고향 쑥고개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체험 등에서 좌절된 꿈과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함께 갖고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술래의 노래」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81년「월간문학」신인문학상 소설 부문에도 당선되어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할 만큼 문재가 뛰어났다.
시집으로는「술래의 노래」「방화」「쑥고개」등이 있으며, 소설집「철조망 속의 휘파람」「우렁이와 거머리」「차표 한 장」등이 있다.
아쉽게도 그는 1996년 9월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몸 강물 되어 하나로 흘러라 -이 규황
이규황 시인은 1961년 평택 서탄면 내천리에서 태어나 오산 중·고등학교와 한남대 국문학과를 나오고, 모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가슴이 뜨거운 시인이었다.
1985년「한반도 젊은 시인들」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고, 1987년「삶의 문학」동인응로, 그리고 1990년 초부터는 경기민족문학협의회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경기지역의 진보적 문학무크「사람과 땅의 문학」동인으로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하던 그가 전교조 오산, 화성 지회장 일까지 맡는 초인다운 면모를 보였을 때, 주위에서는 그의 건강 걱정을 하면서도 제지하지는 못했다.
결국 1997년 6월 25일 투병생활 끝에 한창나이로 세상을 떠난 시인이며 우리시대의 참교사인 이규황, 그의 1주기가 되던 1998년 그를 아끼던 많은 문우와 지인들은 그의 무덤 앞에 유고 시집「두 몸 강물되어 하나로 흘러라」를 바치는 것으로 이생에서 맺은 그와의 짧은 인연을 매듭지은 바 있다.
그의 유고시집 발문에서 이은봉 시인이 말했듯이 이규황의 시에 함축되어 있는 자아의 형상은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그의 시에는 참다운 진실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아가 드러나 있기도 하고, 오늘의 농촌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는 농민으로서의 자아가 나타나 있기도 하고, 또한 분단 조국의 현실을 온몸으로 앓고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아가 표현되어 있기도 한다.
특히 민족문제(분단)를 형상화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그의 고향인 평택 지역이나 그의 생활터전이었던 오산의 특수성 때문이리라.
팀 스피리트 1.
영문도 모른 채 피난을 해야 했다
면직원들과 지소 순경들이 들어와
다짜고짜 피난을 재촉하는데
사람들 급한 김에 이불 몇 채 끌어안고
마을 뒷산을 오른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신기함과 의심에 찬 눈초리로
뒷산 공터에 마련된 군용막사를 기웃거렸고
벌판 끝난 자리
주둔군 비행장에서
끊임없는 기총초사와 함께
여러 편의 전투기들이 날아올랐다
몇몇의 흑인 주둔군 부대가
우리들 앞을 지나갔다
아이들 몇은 그들이 던져주는
레이션과 초콜릿을 들고 Thank you
논밭을 할퀴며 달리는
육중한 전차들
폭격 소리
별처럼 떨어지는 수송 편대들의 낙하산
밤늦도록 터지는 총소리와
예광탄 불빛이 희망처럼 날아올랐다
그리하여
주둔군은 내 가슴에 영원한 평화의 수호자
2. 그해 겨울
우리가
산으로 들판으로
그들이 쏟아낸 탄피를 주우러 헤매이는 동안
1993년 12월 21일
명자 누나는 아메리카의 꿈을 꾸며
기지촌 쑥고개로 갔고
이웃 마을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흑인 혼혈 아이가
태어났다
위의 시처럼 반미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은 사실 민족의 참다운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그 자신의 이상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의 이런 이상이 갈라진 민족이 평화롭게 서로를 감싸안으며 나날의 행복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산동 겨울비 당신은 그 날도 기지촌 정문 앞
휘황한 등불 아래서 비에 젖었지요
미처 다 떨어내지 못한
국화 꽃잎이 젖고
깨금발로 콩콩 뛰며 추위에 떨던
당신도 하염없이 비에 비에 젖었지요
폐쇄된 철도 건널목
침목 밑 자갈 틈새 명아주꽃이
몇 송이 고개를 꺾고
들어주는 이 없어도 노랠 불렀지요
당신의 그 탐스럽던 젖무덤이
꿈속에 그려보던 신천지 아메리카
아아 그땐 황홀한 눈물에 젖었지요
명아주꽃이 몇 번 더 지고 나서
당신은
쓸쓸한 웃음만 남아 겨울비를 흘리네요
떠난 제임스 일등병 다시 돌아오지 않고
톰슨 중사마저 당신을 멀리 할 때
영원히 떠나갈 이 불임의 땅
겨울비에 촉촉이 젖네요
미군의 쑥고개 비행장이 있는 지산동에 겨울비 내리는 날 시인의 비감이 서정적 교감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시인이 쓸쓸하게 지켜보았던 명아주꽃이 우리 누이들이 순정한 모습으로 살아있지만 결국은 미군들의 성적노리개로, 불임의 땅을 살아가는 식민지의 비극을 토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고향을 굽이쳐 흐르는 황구지천을 노래한 시 한편을 소개한다.
황구지천 1
황구지천은 기지촌 비행장 활주로를 지나
서해로 흐르고 /
우리의 슬픔도 강을 따라 흐른다
기지촌 정문 앞에서 서성이던 누이는
꿈에도 그리던 아메리카로 떠나
선진국민이 되었다
마른 들풀이 몇 번 아니라고
아니라고 흔들었지만
몇 년 후 누이는 혼혈의 사내아이를 안고 돌어왔다
양갈보라고 놀리며 돌을 던지던 아이들과
양갈보를 누이로 둔 나는
저물도록 강가에 나가 물수제비를 떴다
긴 여름 해는 강둑에 오랑캐꽃 몇 송이를
피워 올렸고 터진 바짓가랭이 사이로
억새풀이 바람과 함께 흔들렸다
그리움으로 누이는 태평양을 날아왔지만
우리들은 아무도 그 누이를 그리워하지 않았고
누이가 눈물바람으로 떠나던 날
신작로 코스모스꽃들만
이열횡대로 길섶을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향토유적 : 城山城址/無鳳山城/진위향교/금석문/물푸레 나무와 고가/
문충공 심순택의 묘/ 금릉학원과 능성구씨
見山里 府城 (城山城址)
*종별·형태 : 土城
*규 모 : 토성축 150m
*소 재 지 : 평택군 진위면 견산 1리
성산 성지는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견산리에 소재하는 包谷形의 土城으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성으로 유래한다.
견산리는 고구려의 부산현 일대의 마을이며 본래 백제의 송촌활달 부락의 일부였는데 ‘조선 보물 고적사 자료’에는 “고려 시대의 부산현의 읍성지라 하였고, 성은 토성으로 주위 약 250間이고 南門地라 부르는 곳이 대부분 붕괴되었으며, 성내에 견산리 부락이 있다.”라고 되어있다.
또 ‘전국 유석 목록’에는 거의 그대로 인용되어 있어 이곳이 옛 부산현읍의 읍성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성지는 무봉산(해발 208.6m)의 남서쪽으로 뻗은 곳에 해발 35~55m의 능선을 따라 쌓여 있는 포곡형의 성으로서 ‘평택 군지(1984년 간)’에는 동·서·북으로 높이 6m, 길이 250m의 성곽이 남아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조사한 결과 150m만 남아 있었다.
견산리 좌측인 문화유씨 상호군 묘로부터 시작되는 토성은 아파트 단지로 끊어지고 일봉산(해발 40m)이라 일컬었던 북쪽 봉우리가 아파트 건립으로 아예 없어졌으며, 실제로 동쪽 야산에서 돌출된 능선을 따라 150여m만 남아 성의 흔적만 보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토성은 백제가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한수 이남을 지배할 당시 쌓지 않았나 본다. 성의 잘라진 표면(단면)으로 추정해 보면 이 성은 흙을 다져 쌓은 것이라 하겠고, 북쪽으로는 통로에 해당되는 곳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지명 유래에 있어서 서쪽의 하북은 아래 성지, 북쪽의 가곡리는 뒷성지라 불렀으며 동쪽으로 능선 넘어 마을은 산직이라 하여 성을 지키던 병사(산지기→산직)가 거주하는 숙소 마을이었다고 유래한다.
견산리 부성은 ‘평택군지’에서는 城山城址로 명칭되어 있으나 실제 유래 조사 결과 아는 주민은 없었다. 또한 성지의 규모가 작고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보아 마을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군사 요충지적 역할을 갖기 위해 만들어진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성의 안쪽이나 주변에서 채집되는 유물에는 토기나 기와 조각이 있는데 그 중에 삼국시대의 회색토기 조각이 보이고 있다.
無鳳山城
무봉산은 진위면 가곡리와 동천리 사이에 있는 해발 208.6m의 산으로 조선시대의 지리지인 대동지지. 신증 동국여지승람. 진위현읍지. 전국 지리지 등에 진위현의 명산으로 나타나는 산으로 산봉이 춤추는 듯하여 무봉산이라고 칭했다고 전하는데 서쪽으로 가곡리(성 뒷골)가 있고 북쪽으로 사후동(절 뒷골)이 있다.
고려때의 사찰 만기사가 조선 중기까지 있었다가 이전했다는 절터가 남아 있는 곳이며 산세가 험하여 지형적로 산성이라 칭 할 수 있는 곳이나 그 흔적을 찾기는 힘들고 진위현의 관할하에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군사 주둔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이가 가능한 곳으로 ‘한국 성곽과 봉수(한국 보이스카웃 연맹 발행)’에도 수록되어 있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이나 경기읍지 진위현 편에는 釜山 古城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해설이 진위향교 서1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현재의 진위향교 자리로 보아 봉남리의 진위현 소재지를 고성으로 일컫는 것 같다.
봉남리는 진위천을 끼고 동부와 서부. 읍내로 나뉘는데 동부는 옥거리(옥이 있던 거리). 신방골등으로 불리고 서부는 서문. 명당거리 등으로 불렸으며 읍내는 현재의 면(面)청이 있는 자리라 볼 때 현을 중심으로 부산고성지(釜山古城地)라 조선조에 표기한 것이 아닌가 한다.
진위향교
진위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 전국 360여개의 향교 건립이 있었을 때, 지방 교육 정책에 부응하여 당시 振威縣의 중추적 교육의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추정된다.
당시의 건물로 오늘에 이르는 것은 대성전, 명륜당, 서재가 있으며, 중심 전각인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쇠서 두 개를 기둥과 주두에 얹은 이익공식 구조로서, 처마는 겹처마이다.
강학공간인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이며, 이곳이 많은 선비를 배출한 교육의 장이었다. 과거의 교육은, 현재의 초등 과정은 서당에서, 중등 과정은 서원.향교에서 하였으며, 고급과정은 성균관을 통하여 배웠으니, 향교의 역할은 지방에서 절대적이었다 할 것이다.
한편, 진위 향교를 비롯하여 모든 향교에는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立牌를 봉안하여, 그들이 남긴 지혜로움을 본 받게 하였는데 진위향교에는 27명의 입패가 있으며 본래 매년 춘추(春秋) 음력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대제를 드렸으나, 현재는 매년 음력 8월27일에 지내고 있다.
진금석문
금석문이란, 옛날의 석비(石碑), 정(鼎), 종(鍾), 갈(碣), 바위 따위에 새겨둔 문자를 말하며 문자에 의한 전래 가운데 고고학상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송탄은 진위현에 속하여, 통일신라 이후 경기도 남단에 위치한 마을로서 많은 선비와 무관들의 정착지가 되어 왔으며 진위현의 발달과 더불어 삼남 대로상의 집성 촌락이 형성되고 근대에 경부선을 중심으로 현대적 도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곳에 낙향한 선비와 무관들의 유허와 묘갈, 선도비, 선정비등이 산재하며 주로 조선 중기의 석문으로 비견된다.
송탄 금석문의 예
①오 달제. 조 광조 유허지비 이충동에 있으며 정조 24년(1800)의 비로서 忠義閣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②현령 이공 선정비
칠원동의 노변에 있으며 숙종 23년(1677) 3월에 세운 비로서 縣令李公惠壽淸簡0民善政碑라 되어 있어 끝자가 애매하다.
③禦海將軍 石○義의 墓
도일리에 있으며 묘는 도굴된 상태의 파묘비로서 마모가 심하다.
탁본의 전면이 禦海將軍 行 惠山鎭 兵馬 節制使 石○義之 墓로 되어 있고 후면은 治 九年 戊申 三月日 孝子 ○로 되어 있으며 연대 표시상 治를 靑의 順治 연호로 볼 때 순치 9년을 壬辰(1652)으로 되어 있어 맞지 않으며 정확히 추적이 불가능하다.
물푸레 나무와 古家
*종 별 : 형태-古木·古家
*소유자 : 원흥재(38세)
*규 모 : 고목-높이 16m 둘레 3.5m
——- 고가-초가 “ㄱ”형 400년 추정
*소재지 : 송탄시 도일리 상리 안골
고가옥으로 1984년 당시 “T”자형 초가집이었던 이 가옥은 원주 원씨 문중의 후손 원흥재씨가 15대에 걸쳐 내려오는 집으로서 원주 원씨 정착 600년 마을인 도일리에서 초가 형태로 1985년까지 유지되었으나 주택 개량의 여파로 지붕만 슬레이트로 개량하여 오늘에 이른다.
역사적 사실로 효자 원길상(1759~1818)이 살았던 곳이고 대략 400여년으로 본다. 집 뒤편 물푸레 나무는 고목으로, 선조때부터 이 집을 지을 때 작은 나무였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집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볼 수 있으나 전문가의 확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매년 가을이면 고사를 지냈던 나무로 밑둥에는 떡시루를 넣었던 구멍이 나 있으며 둘레는 3.5m 이상의
文忠公 沈舜澤의 墓
문충공 심순택(1824.7.1 ~ 1906.2.2)은 1850년 문과 급제, 1852년 한림 초시에 합격하여 1853년 홍문관 교리(정5품)로 시작한 관직 생활은 1857년 안병군 군수 1861년 부제학으로 이조 참의(정3품 당상관)가 되었으며, 1862년 승정원 승지 1867년 이조 참판(종2품)으로 재직한 후 외직으로 1874년 호서 관찰사가 되었으며 1878년 동지사로 淸에 다녀온 후 1879년 예조 판서 겸 세자 시강원 좌빈객으로 내직에 들어와 1880년 이조 판서가 되었다.
그해 12월 고종(26대 왕 : 1852~1919) 관직 제도를 현대화하여 통리 기무 아문 11개 부서를 신설하였을 때, 이조 판서에서 신설된 기계사·군물사·선함사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그는 군기 제조·군사 훈련 등을 청나라에 의뢰하고, 일본 군사 시설 등의 시찰을 장려하였다.
1881년 도봉소(都捧所)의 당상관으로 옮겨진 후, 임오 군란(1881.6)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입어 파면 되었으나, 대원군 집정이 그해 12월 무산되자 복직되어 의정부 좌참찬(정2품)에 임명되었다.
1883년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1884년 정승에 올랐다. 우의정·좌의정을 거쳤으며 정치적 혼란기에 수구파의 일원으로 있었으며, 1891년 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1894년 동학란을 빌미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영의정에 있었다가 그해 3월 영의정을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1900년 4월 황제의 칙령으로 공훈이 대훈위·훈·공으로 나누어 8등급의 분류 제정된 후, 1901년 공훈 1등 태극장을 수여받았으며, 1902년에 이화대훈장을 받고 원로 대신들이 들게되는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며 황제로부터 궤장을 받고 궤장연의 베품을 받았다. 또한 창녕공에 봉해져 생전에 公으로 봉하는 일의 시초가 되었다.
공이 벼슬을 그만둔 뒤 국정은 점차 일본의 주도권하에 드는 망국에 들게 되었으며, 1905년 을사 오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원로 대신들인 기사에 있던 대신들은 특진관 조병세를 위시하여 모두 울면서 조약반대를 하였으며, 특히 조병세 등 수명이 자결하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심공은 매국노를 규탄하고 원로 대신들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혼란기에 관직에 나아가 국운과 함께 한 심공은 수 80세인 1906년 숙환으로 타계하니 후손들이 생전에 만들어 놓았던 진위군 봉남리 선영에 모시고 후일 향리로 삼아 내려온다.
공의 묘에는 묘비·망주석·문인석·석등 등이 있고 선영 하단에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의 원문은 규장각 대제학·김학진(1838~문인)이 찬하고 당대의 서도가 민병석(시종원, 대훈위)이 썼으며, 두전(頭篆)은 의정부 참정 김성근(1835~1918 : 서도가)이 써서 그 규모나 필체가 화려하다.
錦綾學院과 貞敬夫人 綾城具氏
정경 부인 능성 구씨는 父君인 영의정 심순택(1824~1906)의 부인으로서 부군이 타계하여 그의 묘를 진위군 봉남리의 북서 산록에 쓰고 1914년 봄에 묘소 아래 精舍를 짓고 이주하여 살았던 분이다.
이를 인연으로, 정경 부인 구씨는 평소 후덕한 심성과 착한 마음을 이웃에 보여, 살고 있는 고장에서 공경하고 우러름을 얻었는데, 집이 없고 입을 것 없는 빈곤한 자들에게 도움을 베풀었고, 매년 정월에 극빈자에게 쌀과 찬을 도와주며 춘궁기에 무이자로 대여하고 소작농의 일에 따라 시상을 하는 등 주민들에게 성덕을 보여 만인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였던 분이다.
특히, 배움이 없었던 어린이들의 간절한 염원을 알고, 일찍이 학원을 설립하였던 바, 1912년 구씨 학원이라 칭하는 2년제 학당을 사재로 설립하고 우수한 교사를 초빙하여 후세 교육에 전력하였다.
구씨 학원은 4년제로 바뀌면서 금릉 학원으로 개칭되었으며, 정경 부인이 별세하자 아들 沈左厚씨가 계승하여 해방될 때까지 존속하였다가 진위 국민 학교가 그 규모를 갖추어 가자 자연 폐교되고, 재학생은 진위 국민 학교로 편입되었다.
이후 학교 건물은 주민의 열망에 진위 고등 공민 학교로 전환하였으며, 중학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위치를 변경하여 진위 중학교가 세워짐에 따라 자연히 주택지로 바뀌고, 지금 금릉 학원터에는 마을 복지 회관이 서 있어 격세지감이 있었으나, 이 역시 주민의 복지에 기여함은 사실이라 볼 때 정경 부인 능성 구씨의 업적은 찬연하다.
진위면 소방서 앞에 모여져 있는 신도비중 정경 부인 능성 구씨 공덕비는 기미년 8월 세운 것으로 되어 있어, 1919년 8월에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유형설화: 애마총의 전설/이여송과 빈터 고개/정골비화/빈대바위와 파계승/옻우물
옥관자정/콩나물샘
애마총의 전설
*위치 : 송탄 도원동 도일리 갑골
*형태 : 애마총·울음밭의 울음비 실존
애마총의 전설은 조선시대 명장인 원균(元均 : 1540~1597)과 연관되어 내려오며, 실제로 원균의 묘 봉분 아래 동편으로 자리잡은 말 무덤에 대한 이야기다.
임진왜란 당시의 명장 원균은 경상우수사·충청병사·경상도 통제사 등을 지내고 정유재란시 칠천도 해전에서 전사하는데 그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애마(愛馬)는 선조실록에 2회 등장한다.
첫째는, 선조 27년(1594) 12월 1일, 원균은 경상우수사에서 충청병마절도사로 전임을 하였고 진영(陣營)에 좋은 말이 없어 임금에게 내려주길 원하였다.
이에 선조 임금은 승정원에 명하여 말은 보내는데 선조실록 62권 8면 선조 28년(1595) 4월 乙未條이 보며는 ‘상이 政院에 下校하여 이르기를, 元均의 장계를 보내 戰馬를 얻고자 함이라 이제 내구마(內廐馬) 두 필을 보내어 한 필은 원균에게 주고, 한필은 영중(營中)에 두어 전투용으로 쓰게 하라 하시었다’라고 되어 있어 원균의 애마(愛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1596년 7월 9일 충청병사에서 전라좌도 병마절도사로 전임하게 되었는데 이때 왕이 원균에게 하교하기를 “경이 국가를 위하여 전력하는 충성은 고금에 그 예를 비길데 없으니, 내가 이를 일찍이 가상하게 여기었으나 아직 그 보답을 못하였던 터라 이제, 그대를 멀리 떠나 보내면서 친히 전송하고자 하였으나 몸이 불편하여 뜻대로 못하노라”하시고 특별히 궁중에서 타시던 명마(名馬) 한 필을 내어 주셨다.
원균은 이에 감복하고 이 말을 아끼고 사랑함이 애특하였다고 하는데, 애마총의 전설은 원균의 애마 중 두 번째로 왕에게 하사 받은 명마에게서 비롯된다.
1596년 말, 적의 재침(再侵)이 예견되자 조정(朝廷)에서는 바다의 취약점을 들어 원균의 수군장으로서 역할을 생각하여 1597년 1월 28일 이순신은 전라·충청도 통제사로 원균은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한다(선조실록 권 84, 27면). 이후 경상도 통제사인 원균은 이순신이 죄를 입어 전라도 통제사에서 물러나자 삼도 통제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유년 3월 왜적이 재침하고 수군과 육군은 경상도 육·해에서 접전을 하는 가운데 왜적은 수군의 강병함을 임진왜란시 익히 아는바 거짓 정보로 아군을 교란하면서 수군의 괴멸을 노렸다. 적 첩자 요시라의 거짓 정보에 흔들린 조정에서는 도원수 권율에게 명하고, 남이공(南以恭)을 파견하여 수군의 부산진 공격을 명하였으나 원균은 적의 간계에 걸려들게됨을 우려하며 배후의 적인 육지에 숨어든 적병을 육군이 섬멸하여 바다로 내어 보내기 전에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독촉이 심화되자 원균·이억기·최호 등 수군장들은 “조정의 명령을 어기면 세사람이 죽으나 명령을 따르면 나라일에 크게 욕된다.”고 개탄하면서도 도원수의 독려에 어쩔수 없이 출병하여 100여척의 함대로 가덕도 앞바다에 진출한다.
정유년 7월 8일 웅천에서 적선 10여척을 섬멸하나 적의 척후에 의해 적의 증원대가 밀려오자 영등포로 후퇴하는데 적은 가벼운 배로 복병하여 공격하기 때문에 온라도로 후퇴하였다.
7월 16일 우군 진영을 공격한 적의 대군으로 인해 아군은 후퇴와 혼란을 거듭하고 원균은 칠천도로 물러나니 전의를 상실한 아군의 형세에 적은 육지로 상륙한 원균을 공격하니 원균은 적병에 에워싸여 전사하였다.
원균의 전사를 병영에 있던 장군의 애마가 느끼고는 그가 신었던 신발과 담뱃대를 입에 물고 천리길을 달려 도일리에 있던 원균의 생가에 도착하여 신발과 담뱃대를 놓고 크게 울면서 그 자리에 죽어 넘어졌다. 이에 그의 집에서는 장군이 죽음당하셨음을 알게 되고 영특한 말은 고이 안장하여 그 넋을 달래게 되었다고 하며, 말이 죽은 자리를 ‘울음밭’이라 하였고 말이 묻힌 무덤을 ‘애마총’이라 하였으니 후일 원균 묘역이 조성될 때 장군묘의 아래 부분에 말 무덤을 새롭게 세워 오늘에 이른다.
이여송과 빈터고개
*위치 : 송탄 도원동 도일리 덕암산 서편 능선
*형태 : 해발 105m 폭 2m 내외의 고개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인해 명국(明國)의 군대가 지원될 때에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4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제독(提督)으로서 들어온 이여송(? ~ 1598)은, 본래 강계사람으로 철령위로 도망간 이성량의 아들로서 한국인이면서도 중국의 장수가 되어 왜침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임진왜란중에 남진하였던 이여송은 삼남대로를 통해 다시 북상하며 명으로 돌아갈 때 우리나라의 산세를 보면서 좌·우의 풍수를 보아 큰 인물이 날 만한 자리라며 그 맥을 잘라버리는 행위를 하여 자신의 근본을 망각하는 우매를 범하였다.
이여송이 경기도에 들어서서 칠원을 거쳐 도일리에 주둔하여 잠시 쉬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던 이여송은 덕암산·천덕산 등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수려하고 가히 장군이 나올 곳이라 보았기 때문에 ‘기존의 삼남대로를 버리고 덕암산과 삼남대로 사이의 산맥을 끊으므로서 장군의 태어남을 막아야 겠다’고 하며 군졸을 시켜 길을 닦고 넘어 한양으로 회군하였다.
이여송이 넘어간 후 마을 사람들이 가보니 높은 고개가 생기고 그 마루턱은 평평한 빈터가 되어 주민들이 빈터고개라 불렀고, 이 길은 원곡면을 지나 진위면 은산리로 이어지는데 이 고개 양 옆은 절벽처럼 되어 있고 좌측으로 커다란 느티나무가 자라나 지나는 사람들의 서낭목이 되어 무수한 나무 밑에 쌓여있음을 볼 수 있다.
명장 이여송은 1598년 명의 북방 토번(오랑캐)과의 싸움에서 제명에 못살고 전사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업보를 받았기 때문에 단명한 것이라 말한다.
빈터고개는 지금은 작은 산길에 불과하며 도일리에서 오르는 길은 안골을 통하는데 비교적 험악하고 정상을 넘으면 골짜기를 따라 잡목이 우거진 산길로 내려가게 된다.
정(鼎)골 비화(悲話)
*위치 : 송탄 도일리 정골
*형태 : 용광로 터 밭, 원만주 표의 상석,
동자·문인석 다수
조선 중기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공신책록이 끝난 다음에 공신중 이괄이 반란(1624)을 일으켜 그 혼란이 극에 달할 때에 도일리 안골에는 원만주라는 토호(土豪)가 있었는데, 그 인물이 출중하고 재산이 많았으며 덕(德)이 후(厚)하여 인근에 흠숭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의 정치는 문관들이 크게 득세하고 반정 공신의 큰 비중이었던 무관들은 천시되어 이괄의 반란으로 인심이 흉흉하던 때였다.
평서 이괄을 흠모하던 원만주는 인근 李·朴·金氏 등 72개 성씨들의 지지를 받아 역모를 꾀하게 되었다. 그는 군자금을 만들 요량으로 정골에 가마(용광로)를 설치하고 솥을 만들어 파는 한편, 병장기를 만들고 군막을 지어 군량미를 모으면서 때를 기다렸는데 이괄의 반란이 한양·이천·평택지역을 거치다 진압이 되는 과정에서 주변 72개 성시 중 두려움에 휩싸인 한 성씨가 조정에 밀고하여 나라 쇄신의 기치를 세웠던 이 일은 추진 과정에서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노적가리를 집앞에 쌓으면 앞 동산과 버금간다던 원만주 家는 이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여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들었고 그의 선대 묘는 산산이 파헤쳐져 처참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 그 일족이 주민들의 말로는 전남지방에 산다고 전한다.
안골의 북편 산 기슭의 파묘 2기가 원만주의 선대 묘자리라 하는 데 도굴이 된 것인지 묘혈만 크게 파져있고 묘 앞에 상석의 잔해가, 우측 아래로 망주석·동자석이 좌측 아래로 망주석이 땅에 반쯤 묻혀져 있는데 흩어져 있는 동자석을 애기보살로 모시려고 가져갔던 어떤 무당은 영험이 없이 재수가 없게 되고 부정이 들어 도로 제자리에 갔다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듯이 아무도 손대는 이가 없어 한 일가의 비운을 말해주며, 240여년이 흐르는 시간의 무상함이 정골 용광로 자리의 흔적으로 파도 파도 끊임없이 나오는 무쇠조각들에 의해 느껴진다.
밭으로 일궈지는 정골의 용광로터는 수년전까지만 하여도 또 다른 이야기를 지녔으니, 부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이 정골의 무쇠조각을 주어다 갈아서 먹으면 낫는 다고 전하였다고 한다.
빈대바위와 파계승
*위치 : 송탄시 동부동 장안리 대수골
빈대바위는 부락산(負樂山)아래 소골봉 기슭으로 반구형의 돌출된 바위를 일컫는다.
높이 5m 폭 7~8m의 반구형 바위는 500여년 전에 이곳이 작은 절이 있었다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한다.
유학을 중시하고 불교를 배척한 조선시대의 풍토는 사회 양민들의 빈곤과 사회의 혼란을 가지고 왔으며 수도에 전념할 수도승도 부패에 물들기 일수여서 해학적인 ‘탈놀이’에는 파계승이 곧잘 등장한다.
빈대바위를 중심으로 작은 약수터가 마련되어 있고 이 곳에 절이 있어 스님이 기거하였는데 염불보다 잿밥이란 말처럼 타락의 길로 가는 파계승이었다.
계율을 어기는 수도승을 훈계하려는 부처의 뜻으로 절 뒤 바위에서 빈대가 나와 괴롭힘을 주었으나 깨닫지 못하였고 결국 견디다 못한 수도승은 파계를 하고 절을 떠났으며, 그 뒤 절은 없어지고 바위만 남아 사람들은 ‘빈대바위’라 이름하여 부르며 이 바위가 영험한 것이라 보고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바위주변에는 서낭목이 있고 측면으로 소골봉에 오르는 100여개의 돌계단이 있으며 봉우리 정상에는 무속신앙의 일환으로 돌탑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정상부근에 공터가 있어 매년 추석에 소골·동막·장안마을의 주민이 모여 씨름·횃불놀이·달맞이 등의 행사를 했었다고 전한다.
현대에 이르러 이곳은 무속인들의 발걸음이 잦아 무속신앙의 터전이 되었는데 바위 주변은 약수터와 함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으며 1987.4.13에 허씨가 만든 듯 ‘음각’으로 표시되어 있다. 간헐적으로 만신들이 수양하고 굿도 한다는 빈대바위 주변에는 검게 그을린 바위·낙루된 촛농 등이 많으며 서낭목인 참나무 고목에는 청·홍색의 띠가 매어져 있다.
옻 우물
*위치 : 도일리 상리 팔룡산 기슭
*형태 : 샘(폭 106cm 깊이 1m)
옻 우물은 도일리의 마을 역사와 연륜이 같다(약 1천년)는 이 우물은 본래 상·하 두 개로 위 옻우물·아래 옻우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원로들의 이야기로 주변산에서 옻이 옮으면 아래 옻우물에서 목욕하고 위 옻우물의 물을 떠서 먹어야 나았다고 한다.
뒤편 팔룡산은 여덟 용이 승천한 산이라 하여 산 정상 아래 작은 샘이 솟으며 가뭄에도 물이 줄지않는다는 얘기가 전하듯 그 정기가 높아 옻우물도 약수로서 그 효용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며 약수위에 ‘약천사’라는 사찰이 1974년경 세워져 절을 찾는 신도들에 의해 옻우물의 물맛이 알려지자 인근 평택시 주민들이 즐겨 떠간다고 한다.
본래 두 개였던 우물중 아래 우물은 1985년경 농지를 개간하면서 길 옆 웅덩이로 전락하였다가 메워졌고 약천사의 식수원이 되는 위 옻우물만이 남아있다.
위 옻우물은 약천사에서 깨끗이 관리하며, 우물위에 신도가 세운 우물신 숭상의 비가 하나 있는데 비의 앞면 좌·우로 ‘右補處 和修吉龍王 左補處沙창 羅龍王’라 각인되 있고 중앙에는 ‘南無離濯熱 保生歡井神’이라 되있으며 8하단 기석에는 ‘施主 乾命庚子生 金在七 保體’라 써있다.
옥관자정(玉貫子井)
*위치 : 도원동 칠원마을
*형태 : 우물(가로 2m,
세로1m, 직사각형 형태)
옥관자정은 삼남대로가 지나는 칠원마을 도로변에 위치한다.
칠원(七院)은 옛 지명이 葛院으로 칡이 많아 갈원이라 했다는데, 갈왕골이라고도 하며 일찍이 역원(驛院)으로 충청도로 들기 전에 말을 바꾸거나 쉬게 하는 서울로부터 1일 행로에 들던 곳이기 때문에 나그네는 누구나 옥관자정에서 물 한모금 청하기 마련이다.
조선 인조시대(1623~1649)의 이야기가 이 우물을 옥관자라 부르게 하여 통상 옥관자정이고 다른 이름으로는 옥수정(玉水井)이라고 하기도 한다.
관자(貫子)란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관직에 나갈 때 망건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정 3품 당하관은 대매(玳瑁 또는 黑角), 정3품 당상관은 옥관자(彫刻), 종2품은 금관자(金貫子 ; 彫刻), 정2품은 환금관자(還金貫子), 정·종 1품은 환옥관자를 다는 구분이 있었다.
칠원 옥관자정 유래는 인조시대, 왕이 팔도를 순례하기 위하여 남행(南行)할 때 칠원에 도착하여 관원에게 물을 떠오라 시키니 즉시 옥수정의 물을 떠서 올렸고 왕은 그 물맛이 뛰어나서 극구 경탄하며 우물에게 벼슬의 호칭을 얹어 옥관자를 내리고 옥관자정으로 고쳐부르게 하였다고 전함에 있다.
옥관자정은 인근에서 가장 물맛이 좋아, 일 칠원의 옥관자정, 이 제역의 박우물, 삼 석정의 돌우물이라는 말이 으뜸을 차지하고 400여년의 풍상에 견디며 오늘에 이른다.
한편 칠원마을이 갈원에서 칠원이 된데는 역시 왕의 순례와 관계가 있어 마을이 빈번한 교통지에 위치함을 알게한다.
조선 영조때(1759년)의 여지도서에도 갈원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의 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팔도를 순례시 갈원에서 하루를 쉬게 되었는데 그만 병이 나고 그 원인을 추이하니 칡으로 인한 것이라 하였다.
다음날 일어난 왕은 마을 명이 칡갈자를 쓴 갈원이라 함을 고쳐 칠원이라 부르라고 명을 내려 칠원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곱 칠(七)을 쓴 이유는 전하는 바 없으나 당시 한양에서 칠원에 이르는 노정(路程)을 보면 한양-배다리-조기정-매교-떡전거리-오미진-진위읍-칠원으로 보아 일곱 번째 휴식처로 볼 수 있어 왕의 행로가 삼남대로상 위와 같이 되어 칠원이라 한 것 같다.
칠원 마을은 왕들의 행적에 연관된 이야기와 실제적 유적인 옥관자정이 함께하여 그 의미가 큰 곳이다.
콩나물 샘
*위치 : 도원동 도일리 암말
*형태 : 작은 웅덩이(직경 2m)
도일리 암말은 내리저수지를 끼고 돌아들어가 덕암산 기슭에 있다.
4-5호의 집이 있는 이 곳에는 조선 선조때의 장군인 원균 생가 터가 있고 그의 동생으로 삭주도호부사를 역임한 인조때의 인물 원지의 집이 실존하고 있는데 콩나물 샘은 원지의 집 앞에 있는 작은 웅덩이를 말한다.
논의 웅덩이로 보이는 이 샘이 콩나물 샘으로 불리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예전에는 온이 함께하지 않고 그냥 샘으로만 있었는데 주변의 아낙네들은 나물이나 쌀을 씻는 곳으로 이 웅덩이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웅덩이에는 항시 콩나물이 자라고 있어 풍수에 능한 사람을 데려와 물어본득 ‘산너머 진위현·읍을 지나는 장호천에서 콩나물을 씻는 중에 떠내려가던 콩나물이 산 밑 수로를 통해 이 곳까지 와서 솟아 올라 콩나물 샘이 되었다’고 알려주어 이후 콩나물 샘으로 통하는 곳이 되었다고 전한다.
사시사철 마르는 법이 없는 이 샘으로 인해 샘 주위가 화전으로 개발되어 논의 한 켠에 위치하게 되었다.
샘 옆으로 원지 장군이 말에 타고 내릴 때 딛었다는 하마석이 있고 말 고삐를 매던 나무가 존재하며, 그의 집 뒤로는 400년 수령의 모과나무 한 그루만 풍상을 견디며 아직도 향내를 뿜고 있다.
무형설화: 오리골과 맹정승/제역마을과 경포산인/성물백이/풀무골의 설화
/칠원리 은행나무 설화/ 아리랑 고개/왕재의 유래/풍년나무의 설화/역마 바위
오리골과 맹정승
*위치 : 송북동 오류곡
*형태 : 구전설화
진위현·읍지의 신중(新增)편에 나오는 인침담(印沈潭)에 대한 설명이 이 설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오리곡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 550여년전에 나라의 삼정승중 한 분이었던 맹사성(1359~1438)이 고향인 온양에서 한양을 통행할 때 항상 검은 소를 타고 퉁소를 즐겨 불며 지났디고 한다.
그는 축지법에 능하여 한양을 쉽게 다녔는데 삼남대로가 지나는 진위현 우곡마을을 통과하기가 다반사였다. 하루는 오리곡의 토호인 단양 우씨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데 ‘매일같이 검은 소를 타고 우리 마을을 지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매 아침마다 재수없는 일이다.
하인을 시켜 왜 검은 소를 타고 가는지 알아보고 쫓아 내자’라고 중지를 모았다.
하인이 나가 지키면서 맹정승을 기다렸는데 맹정승이 보이자 따라가기 시작하였으나 너무 빨라 도저히 잡지를 못하였다.
맹정승은 신통하여 누가 자기를 쫓아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흰치재를 넘기 전에 감주거리(송북동 동막 앞)에서 기다리다가 하인들이 다가오자 ‘너희는 누군데 나를 쫓아왔는가?’라 물었다. 하인이 ‘우리는 오리곡 우씨댁 하인입니다. 우리 주인이 이르길 매일 아침마다 검은 소를 타고 가는 이가 누구이며, 왜 불길하게 검은 소를 타는가 알아보라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맹정승은 이에 ‘맹골 맹정승이 까막소를 타고 한양 좀 다녔기로 왠 참견이나’고 호통을 쳐 하인들을 돌려보낸 후 심성이 고운 맹정승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도리가 아닌지라 다음부터는 오리곡을 통과하지 않고 그 옆 산을 따라 우회하여 다니니 이때부터 산남대호의 오리곡 길이 인근 오룡동 쪽으로 우회하여 지누이를 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진위현·읍지 1843년 편에 나오는 인침담 설화를 보면, 인침담은 현 남쪽 5리에 있다하여 지금의 오리곡 앞 들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맹정승이 온양에 살고 있었는데 한양에 부름받아 올라갈 때, 마중하던 원님들이 물어보자 허름한 옷차림의 맹정승을 몰라보고 맹정승은 ‘원님들을 알고 있으나 피곤하여 내릴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모든 원님들이 놀라 어쩔줄 모르면서 엎드리는데 그 와중에 인신(印信 : 관의관인)이 연못에 떨어뜨려 빠지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이 후 인신이 빠진 그 연못을 인침담이라 불러왔는데 주변이 논으로 만들이 지면서 없어지고 진위현·읍지상에만 이야기로 나타난다.
맹사성에 관련된 이 이야기는 경기도 남부지역에 비교적 여러군데서 비슷한 유형으로 발견되는 것이며, 오리골과 맹정승에 얽힌 이야기로 구전되는 것은 우리 고장에만 보이는 이야기로 위의 두 유형이 서로 일맥 상통되는 설화로 볼 수 있다.
제역마을과 경포산인
*위치 : 신장 1동 남산터
*형태 : 마을 유래로 진위 현읍지 상의 인물편에 나타난 인물 이야기
현 송탄 신장1동은 예전에 시로 승격되기 전에는 제역이라 불리웠다.
제역이란 조선 시대에 부역을 면제한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에는 한 정승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여 내려 오고 있다.
조선 시대인 성종때 인물로 최수성(崔壽城 : 1487~1521)이란 분이 있었는데, 호는 원정(猿亭)이요, 북해거사(北海居士), 경포산인(鏡蒲山人)으로 불리웠던 선비로서 강릉 최씨였다. 이 분은 8세때 진위현으로 이주하여 학업에 정진하고 원산(猿山)에 정자를 만들어 원숭이를 벗하며 기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원정이라 하며, 진위 유림의 학자들과 시론하며 지내셨다.
최정승은 9세때 문예적 기질이 높아 주변의 칭송을 받았으며, 19세에 명산을 두루 살피시고 경륜을 높였으니, 그분의 그림은 왜인들이 매우 감탄하여 탐내어도 구할 수 없었다 한다. 그러나 최정승이 벼슬에 뜻이 없이 지냄은 연산군의 폭정에 실망하고 이어 중종때에 사림파 학생들이 점차 득세하고 정치를 잘 주도 하나 귀족간의 시시비비와 당쟁이 조장됨에 회의적이어서 세상을 덧없이 보는 한 분 도인으로 살고자 하셨다.
그러나 평소 조광조 등 사림의 학자와의 왕래가 있어 중종 14년(1519)에 있었던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곤욕을 치룰뻔 하였으나, 다행히 벼슬이 없어 면하고, 더욱 관직이나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후학을 키우며 명산을 순례하며 문예에 정진하였었다.
중종 16년(1521)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고 이에 연류시킨 간신의 모함을 받아 10월 21일 향리에서 참형을 받으셨다.
공이 참수되던 때 천지가 수백리에 걸쳐 진동하고, 사흘 밤 낮으로 피비가 끊이지 않고 내려 그의 죽음을 하늘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중종 33년(1538)에 기묘사화로 죽은 이를 용서하였으며, 중종 35년(1540)에 공의 누명을 벗겨주고 중직으로 의정부 좌찬성, 판의금부사에 봉하였으며, 인종 원년(1545)에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으로 내려졌다.
공의 묘는 진위현 원산에 있게 되었으며, 우림에서 받들게 되었다.
선조 1년 4월, 조광조는 복귀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 후, 이이(이율곡 : 1536~1584)선생이 최정승의 학문을 깊이 흠모하여, 왕께 간하여 공의 묘를 수호하고 잘 시묘토록 주변 10리 안에 마을 주민의 부역(賦役)을 면하도록 하였으니, 이 때부터 인근 10리 안의 마을을 제역(除役)마을이라 불렀으며, 근대에까지 최정승의 묘가 있었으나, 1950년대에 주변에 비행장이 들어서게 되어 강릉 최씨 문중에서 이장하였다.
송탄에는 공의 후손이 남아있고, 강릉 최씨 진위파로서 일맥을 잇고 있다.
성물백이
*위치 : 이충동 동령리
*형태 : 동령리 입구 야산 계곡
조선조때인 1759년경 발행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당시에 진위면 송장면 동령리로서 그 이전에 송장현이었을 때, 현의 현치소(縣治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와 함께(土城)이 존재했다 하며 이 토성은 고려 초기부터 전략 요충지로 써왔다 한다.
현재 동령 마을 입구(서정리 쪽) 부근에는 암탉골이 있었으며, 지금 그곳은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암탉골의 밭에서는 수많은 기와조각이 나오고, 이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동령부락에 큰 부자가 살았었는데 그 부자집에 우환이 끊이지 않아 재산을 정리하고 멀리 떠나게 되었으며, 부자가 살던 집은 폐허가 되어 그 잔해가 나온다고 하는데, 암탉골 옆에 골짜기가 있어 성물백이라 하는 곳은 인근에서 볼 수 없는 커다란(통상 둘레 1m, 가로 1m, 세로 40cm 정도)주춧돌, 성곽의 돌인 것 같은 것이 땅속에서 발굴되고, 오래된 기와가 나와 추측하건데 조선조때 성문이 있지 않았나 하며, 곧 이름이 성물백이인데 서울의 장승백이와 같은 어원으로 보아 성문 밖이라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성물백이 골에는 밭농사를 하는 외딴 집 한 채 뿐으로, 수시로 큰 돌이 나와 깊이 개간을 못하고 터 밭으로만 가꾸고 있다 하는데, 1759년의 여지도서에 의하면 그 당시 동령의 인구는 62호 109명으로 나타나 있어, 제법 큰 마을로 볼 수 있으며 지리학적으로도 전략 요충지라 하였으니, 바닷물이 동령앞까지 들어왔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해군이 주둔하지 않았나 한다.
세종 실록(世宗實錄)에 나타난 진위현의 호수는 221호였고, 여지도서로의 호수는 1,801호 였으며, 군대는 세종때 시위군 10명, 선군 51명으로 보아 여지도서 발간 당시 그 8~9배에 해당하는 400여명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니 동령마을의 규모는 매우 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풀무골 설화
*위치 : 송북동 부락산 북편 골짜기
*형태 : 구전 설화
송탄 소골은 그 유래가 두가지로 대변된다.
하나는 우곡(牛谷)이라 표현하듯 소가 누워있는 지세에 있다하여 우곡이라는 것이요, 하나는 옛적에 소(蘇)씨가 살고 나간 고장이라 하여 소골이라 한다는 것인데, 후자의 소씨 설에 대해서는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60년경 소씨 성을 가진 정승이 살고 있었으며, 진산 소씨로서 주변 골골마다 그를 따르고 숭상하였는데, 당시의 고려 조정은 원나라의 지배하에 어지러운 정치와 불교 숭상의 도가 지나쳐 중 신돈을 정치에 깊이 참여시키니, 신돈은 고려의 혼란함을 개혁코자 힘쓰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고자 노력한 자는 평민으로 해방시키는 등 많은 인심을 얻어 좋은 평을 들었으나, 차츰 공민왕의 신뢰를 얻고 왕의 행동이 흐트러짐에 따라 권한을 남용하여 오만함과 방탕한 음행을 일삼으며, 평소 적대적이었던 귀족 계급과의 불화가 심화되고, 각처에서 양반과 노비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어 극도의 혼란기가 도래되는 때, 소 정승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부락산 동북쪽 기슭에 위치한 남북으로 한양과 삼남이 통하며 넓은 평야에 위치한 곳으로서 소 정승이 일찍이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소 정승은 국가의 공록에 힘입어 지방의 토호와 친밀하였고, 학식과 덕망이 인근에서 높았던바, 나라의 포악한 정치에 개혁의 소신이 강한 분이었으니, 그의 말에 동조하는 주변의 사람들은 신돈의 탓이라 하여, 그를 처치하고자 모병하고 반란을 꾀하도록 하였다.
이에 소정승은 불학산 서편 골짜기에 대장간을 차리고 병장기를 만들며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하면서 시기를 기다렸다.
소정승에게는 한 지혜로운 며느리가 있었는데, 이 며느리의 신통함은 평소 앞 일을 알고 예언함에 있었다.
이윽고 소 정승은 군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출병할 뜻을 가족에게 밝히니 며느리가 아뢰오기를 “아버님, 벼 한말을 찧어 쌀 한말이 나올 때에 출병하시어야 성공할 것이오니 한번 해보시오소서”하니, 소 정승은 기꺼워 하며 “어찌 벼 한말이 쌀 한말이 되랴마는 네 말이 신통한지라 한 번 해보도록 하마”하며 하인을 불러 벼 한말을 가져다 찧도록 하였다.
하인이 가져온 벼는 찧어보니 8되 7홉이라 소 정승 가로되 하인을 가르키며 ” 네 이놈, 아무리 벼 한 말을 찧어 아홉되도 안 나오느냐? 네 놈이 됫박질을 잘못하지 않았느냐?”하며 다시 됫박질을 하여 오도록 명하니 하인은 다시 광으로가 넉넉히 담아 벼 한말을 가져왔다.
두 번째로 찧으니 쌀이 9되 7홉이라, 소 정승은 며느리를 꾸짖으며 말하길 “어찌 생각하느냐? 과연 벼 한말이 쌀 한말이 될 수 있느냐? 너는 어찌하여 그런 말을 터무니 없이 하여 나의 마음을 흩으리려 하느냐?”하고는 며느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주를 목표로 하여 출병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관군은 사전에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였던 바, 일격에 이들을 격파하고, 소 정승은 역적으로 잡혀 처형당하였으며, 삼족을 멸하는 참화를 입으며, 소정승의 선산은 파헤침을 당하였다.
관군이 소골에 이르러 소씨 종산의 묘혈을 파고 그 맥을 끊을 때, 갑자기 큰 용이 나와 용트림 하는데, 자세히 보니 손과 발이 없는 용인지라 아사(餓死)토록 하였으며, 일설로 소씨 마을 우물에서 뒷다리가 펴지지 않은 소가 나왔다고도 하였다.
후인들은 소정승이 며느리의 말을 듣고 참았더라면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전하며, 소 정승이 만들었던 대장간 자리는 풀무골이라 칭하며, 반란에 실패할 때, 소골의 우물엔 병장기와 모의때 쓰던 물건을 한꺼번에 넣어 증거인멸을 했었다고 한다. 조선이 개국하고 소 정승 일문도 복위가 가능하게 되어 흩어졌던 후손이 조상의 묘를 복원하니 현재 소골에 소씨는 살지 않으나, 묘가 10여기 남아서 이야기를 전해주며, 후손들은 매년 9월이면 찾아와 벌초를 하고 선영을 돌보나 소골에 들어와 사는 이는 없다고 한다.
칠원리 은행나무 설화
*위치 : 도원동 칠원리
*형태 : 구전 설화
때는 1940년경 일제 압박 통치로 우리 백성이 수난을 당하던 시기였다.
당시 칠원마을은 꽤 번성한 곳으로 안성과 평택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주막이 형성되고 일제의 분치소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1919년 삼일운동 때는 이승훈 투사 등이 만세를 불렀고 군중을 모아 원곡면 주재소, 면사무소를 습격하려 움직였던 곳이다.
이 마을엔 수백년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마을 남쪽 서편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 나무의 수세는 잔가지가 평택에 닿고, 큰가지가 평상(平床)처럼 퍼져있어 동리 노인들은 그 위에 장기판을 얹어 놓고 한담(閑談)을 주고 받았었다 하는데 이 나무가 1940년경 에 베어 없어지면서 실제로 발생하였던 괴이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야기인즉, 은행나무가 있던 산의 주인은 박(朴)씨로서 부자였던 일본인 나까야마에게 산을 팔아 버렸으며 일본인 나까야마는 산을 사고난 후 산 주위에 담을 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하여, 주민의 원성을 샀으며 더욱이 은행나무 휴식처를 사용 못하게 하고 베어서 자신의 집에 가구로 쓰겠다고 호언하였다.
이윽고 주민들에게 품삯을 넉넉히 줄터이니 모여서 은행나무를 베자고 하니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귀신붙은 성황나무는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친구처럼 만지고 아끼던 나무를 내 손으로 베어 넘길 수 없다.”하며 응하니 않았다.
그러자, 나까야마는 “조센진들 두고보자”하며 욕을 하고 “네놈들 아니면 일할 놈 없을까?”하며 타 동네의 사람들을 사왔다.
그러나 누구하나 연장을 빌려주지 않자, 연장도 사왔으나 감히 일꾼들을 먹이고 재워줄 집도 나서지 않아 나까야마는 주재소에 의뢰하여 일경이 은행나누 옆 이(李)씨 집에 일을 시켜 작업을 시작하였다.
나무를 베어 공터에 쌓으니 산더미 같았고 그 뿌리는 도저히 제거하지 못하고 작업을 마친 후 큰 둥지는 나까야마 집에 가져가고 나머지는 방치하였는데 여기서 내변이 발생한 것이다.
일꾼의 밥을 내었던 이씨 집안의 장손의 시름시름 앓다가 미쳐 버렸고, 타동네에서 작업왔던 인부들은 벙어리가 되었으며, 잘라서 방치된 나무를 집어다 땔감으로 쓴 사람들의 아이들이 장님이 되어버리니 온 동네가 시끄러웠으며, 일본인 나까야마는 차츰 차츰 몰락하여 해방되던해 상거지꼴로 쫓겨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은행나무의 변괴는 계속되어 나무옆의 집인 이씨는 종해 이사하고 타인들이 들어와 살제 잠시만 사람이 비어도 방과 부엌, 세간에 뱀이 기어다녀 그 피해가 크니 그 또한 살지 못하고 떠나 빈집으로 폐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후일담이지만 은행나무에도 신령이 있었다고 주민은 믿으며 뱀의 이야기는 은행나무의 뿌리가 너무 넓게 퍼져있어 뱀의 동면에 적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혀졌으며,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로서 평택 재령(현 비전리)에 암은행이 있어 서로 짝을 했다고 하니 수십리 밖의 나무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큰 나무였음이 상기 되어 오늘날까지 살아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아리랑 고개
*위치 : 서정동 점촌마을
*형태 : 구전 설화
송탄 서정동은 옛적에 점촌(店村)이란 마을이 부락산 서편 줄기에 형성되어 있었다.
점촌은 본래 빈촌으로 항아리 굽는 옹기장이들이 모여 살며, 항아리를 팔았기에 점촌이라 하였던 곳이다.
점촌에서 동북쪽에는 아리랑 고개가 있었으며, 이 고개에 얽힌이야기가 전래 오고 있다.
아리랑 고개 주변에는 돈이 있는 부자들이 서넛 모여살고 있었으며, 집집마다 자손이 많았으나 유독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샘물 앞 박씨 부부집만 후손이 없었다.
박씨 부인은 날마다 정한수를 떠 놓고 아들을 기원하였으며, 부부간의 금실을 주변의 누구보다 좋았다. 그러나, 박씨 부인의 남편이 갑자기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더니 덜컥 죽고 말아, 홀연 과부가 되어버린 박씨 부인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개가를 하였다.
많은 재산을 탐내는 남자들 중 한 명을 택하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인지 새 남편마저 병을 얻어 죽으니 다시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죽은 남편은 아리랑 고개 턱에 묻고 또 새 남편도 그 옆에 묻고 다시 얻은 남편 역시 죽어서 묻고 하기를 여덟이요, 무덤은 아홉이 되었다.
주변의 아낙들은 “무슨 여자의 팔자가 저런지?”하며 수군대고, “저 여자는 색정이 저렇듯 강하여 남자들이 못 견디고 죽은 모양이야”하며 손가락질을 하였다.
아홉 남자를 여윈 이 부인은 다시는 남편을 맞지 않으리라 하였으나, 잠시였고 다시 열 번째 남자를 맞이하였다.
이에 동네 부인들은 “또 며칠이나 갈까?” 애꿎은 남정네 하나 죽어 나가겠군”하며 소곤대었으나, 이 부인은 전에처럼 남편이 죽지 않도록 갖은 정성을 다하는 가운데, 오히려 이 부인이 병을 얻어 죽게 되었다.
부인이 죽자 열 번째의 남편은 앞선 아홉 사내의 무덤 아래 부인의 묘를 쓰고 극진히 장례를 치른 후, 상이 끝나자 부인의 재산을 모두 팔아 아리랑 고개를 넘어 떠나버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하며, 아리랑 고개턱에 그 부인의 집터와 샘, 아홉 무덤과 부인의 무덤 및 상석이 있어 전해왔으나, 해방이 되던 1945년경 주민들이 상석을 깨어버리고 도시 계획에 의하여 점촌의 옹기마을이 없어지면서 이 또한 흔적이 없어 졌다 한다.
왕재의 유래
*위치 : 송북동 오좌동 마을
*형태 : 수성 최씨 선영, 문중 설화
조선 시대 중종 4년(1509년)에서 선조 22년(1589)까지 사셨던
최희효(崔希孝)란 분에 얽힌 이야기로
그는 일찍이 부친을 잃어 부친상을 모시길 지성으로 하다
중종 26년(153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정주판관, 선천판관, 부령부사 등을 지냈으며
경정좌수사를 거쳐 전라우수사로 계실 때 [명종 12년(1557년)]
왜선 3척이 바다에 있음을 수상이 여겨 정탐하니
명나라에 가서 노략질한 것임을 알게 되어 왜선을 나포하고 200여인을 생포하여
후일 안주목사를 거쳐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는데
무관이라 업신여김을 탁월한 문장과 덕행으로 누르고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여 충청 병마절도사를 제수하였는데
돌연 병을 얻어 낙향하여 오좌동에 기거하다
선조 22년(1589)에 세상을 떠나니
왕께서 슬퍼하시고 직접 권 율 장군을 예관(禮官)으로 하명하여
봉표치제(封表致祭)하게 하였는데
이 때에 묘소 후면의 산봉(山峰)을 왕의 사신이 넘어와 왕명을 하달하였다 하여
그 산봉을 왕재라 칭하였다 하는 설화가 전해진다.
풍년나무의 설화
*위치 : 동부동 가재 마을
*형태 : 구전 설화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가재 마을 입구에 커다란 아람되는 풍년나무가 있었다 하는데
이 나무는 매년 농사철이 시작될 때면 마을 주민들에게 풍년의 여부를 알려주었다 한다.
주민들이 들에 나갈 때마다 쳐다보고 잎이 무성하길 빌며
또한 무성하면 풍년이라 좋아하며 일을 나갔다 하며
매년 어김없이 이 나무의 예견이 들어맞아 주민들은 신령한 나무로 보호하였다.
그리고 모르는 이들에게 이 나무를 손대면 동티(탈)가 난다고 하였는데
지금부터 30년 전쯤 이 마을에 이주한 김해 김(金)씨는
은근히 나무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어느날 나무에 손상을 입혔다 하며
이로 인해서인지 자연히 시들어 가던 풍년나무는
20여년 전 완전히 고사(古死)하여 그 자취가 없어졌으며
나무를 손상한 김씨는 수년간 정신병을 앓다 죽었다 하니
주민들은 나무의 신령을 다쳐서 그렇다 한다.
역마바위
*위치 : 장안리 중봉
*형태 : 사방 2m의 바위(묻혀 있는 부분 제외)로 말 발굽형의 ∪ 부분이 있다.
장안리에서 동쪽으로 정두진씨의 농가를 지나 1km쯤 가면 길 남쪽으로 중봉이란 산을 찾을 수 있다.
산을 북편 기슭에서 8부 능선까지 올라 좌편으로 살피면 사진과 같이 돌출된 가로 1m, 세로 70cm 정도의 바위를 보게 된다.
바위 중앙부는 직경 10cm 정도의 원형홈이 있으며, 그 형태는 주민들의 이야기와 같이 말발굽형이라 할 것이나, 완전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 바위가 지닌 이야기는 옛적에 한 장군이 있어, 그가 무술을 연마하고 말을 달릴 때에 지금의 부락산(佛岳山 : 佛鶴山, 負樂山 等로 진위현지, 군지, 각 문중 족보등에 표기하였음)에서 말이 뛰어 종봉산록에 내리니, 말의 발굽이 바위에 찍혀 움푹 패이고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온다고 한다.
민속놀이 : 줄다리기/장치기/지신밟기/기싸움/백중놀이/거북놀이/지경다지기
민속놀이
송탄의 민속은 1920~30년대까지만 해도 매우 다양하게 분포되어 연희되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정월이면, 거의 마을마다 줄다리기, 달맞이, 횃불싸움 등을 했으며, 8월 한가위에는 모든 마을에서 거북놀이가 성행하였다.
농사철이 돌아오면 농악이 서로 마주해 두레싸움이 벌어지고, 들이나 산에서는 초동들이 얼레공 놀이를 하였으며, 서정리 장터에서는 7월 백중이되면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바탕 흥겨운 백중놀이를 펼치고 황소를 타 가는 씨름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던 민속놀이는 거의가 1940~50년대에 중단되었고, 이제는 마을의 노인들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년 초의 지신밟기나 이충동 동령마을의 줄다리기만이 전승되고 있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지방에 따라서 정월 보름, 5월 단오, 8월 한가위 등에도 하지만 대개는 정월 보름에 하고 있다.
이는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연희되기 때문이다. 최남선의 <조산상식 풍속편> 인색(引索 : 줄다리기)에는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의 정월 15일 풍속에 짚, 또는 칡으로 큰 줄을 수 십발이나 되게 길게 꼬고, 줄 양쪽에는 수많은 작은 줄을 매달아 둘로 편을 갈라 줄을 서로 잡아당기어 승부를 가린다.
이기는 편에 풍년이 든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줄다리기라 한다.」 송탄의 경우에는 아직도 이충동 동령 마을이나 도일리, 상리 등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을 전후해 줄다리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의 보존에 뜻이 깊은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송탄의 인근에서는 옛 수원군 고색이나(현 수원시 고색동) 평택군 진위 등에서 수백명씩 몰려들어 한바탕 난장이 트고 주위의 여러 마을에서 서로 농악대를 앞세우고 모여서 줄을 당겼기 때문에 마을마다 줄다리기를 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현재 줄다리기가 전승되는 동령마을이나 도일리 외에도 서정리, 가재리····지장, 건지 등 여러 곳에서 50~60년 전만 하여도 정월이나 5월 단오때 마을에 모여서 줄다리기를 했다고 한다.
특히 평택군 진위면 은산리는 용인군 남사면 진목리와 안성군 원곡면 산하리가 서로 마주하고 있는 마을로서 한창때는 300여호가 넘는 대동(大洞)이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3개군의 마을에서 저마다 농악을 앞세우고 모여들어, 먼저 농악으로 서로 기예를 겨뤄 한쪽으로 흡수한 후에 주위의 여러 마을에서 모인 사람들이 남자는 숫줄에 여자와 아이들은 암줄에 매달려 줄다리기를 하였다.
줄의 길이는 한쪽이 50~60m가 넘었다고 하며 용목의 굵기가 1m가 넘고 줄을 꼬는데만도 이틀씩이나 소요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30~40년 전만 하여도 마을마다 연희되던 줄다리기는 광복 이전에 거의가 중단되고 현재는 이충동 동령마을만이 옛 줄다리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줄다리기가 중단된 까닭은 일제 강점기에 줄을 다린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민족봉기를 할 우려가 있고, 더욱 하루가 아닌 2~3일씩이나 계속해서 줄을 당기게 되면 노동력의 동원이 어려우며 정신적인 결속으로 인해 지배하기가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장치기(얼레공치기)
우리나라의 많은 민속놀이 가운데 유일한 구기종목인 놀이는 장치기이다.
이 장치기는 마을의 어른들로부터 초동에 이르기까지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장소의 넓고 좁음에 관계없이 어느때나 즐기던 대중적인 놀이였다.
장치기는 오늘날의 <필드하키>와 비슷한 놀이로써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나무를 공처럼 둥글게 깎아서 사용하거나 짚을 공처럼 뭉쳐서, 장이라는 채를 사용해 공을 자신이 속한 마을의 문으로 몰고가 집어넣는 편이 이기는, 승부성 민속이다.
경기도에서는 한수 이남의 전역에서 이 장치기가 얼레공치기란 이름으로 매우 성행하였으며 특히 수원, 용인, 이천, 광주, 송탄, 평택, 오산, 안성 등지에서 많이 나타났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장치기의 놀이방법이나 경기규칙은 지역마다 약간씩 다르게 나타나는데 마을과 마을이나 단체가 경기 할 때는 넓은 공지가 형성된 곳을 정하고 택일을 하여 농악대를 앞세우고 시간을 정한 후에 경기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1931년 2월 1일에 서탄면 황구지천에서는 전국의 32개 남 녀 팀이 참가한 전 조선 얼레공대회가 열렸다. 동아일보 1월 244일자부터 30일까지 사보를 통해서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얼레공대회를 개최한다고 예고가 실렸으며, 한 팀의 선수는 각 5명으로 구성하였다고 하였다.
이 전국 얼레공대회를 참관했던 고증인들에 따르면 눈이 발목에까지 빠질 정도로 많이 내려 온 천지가 하얗게 변했는데, 황구지천 앞에는 온통 까맣게 뒤덮혔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일제 치하였기 때문에 흰옷을 못 입게 하여 모두가 검정색으로 물감을 들여 옷을 지어 입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 곳에 모인 전국의 선수들만 하여도 160여명이나 되었으니 아마 천 여명은 모였으리라고 한다. 당시의 그런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송탄(松炭)의 전역(全域)에서 얼레공치기라고 하여서 매우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탄의 장치기는 대개 마을의 청장년들에 의해 경기 형태로 연희가 되었으며, 초동들이나 나뭇꾼들이 서로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30년전 까지만 하여도 얼레공치기를 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나, 마을마다 대대적으로 하지는 않았고 학생들의 경기나 일부 청장년들에 의해 이웃 마을과의 경기로 연희되기도 했다.
시내 외지인 서탄면이나 고덕면 등에서는 상당히 격렬한 경기를 해서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앞서 기록한 전 조선 얼레공대회의 영향으로 보인다.
지신(地神)밟기
매년 하늘에서 평신(坪神)이 내려온다는 정월 2~3일 경에 마을마다 시작되는 지신밟기는 지방에 따라서는 <마당밟기> 또는 <埋鬼놀이>라고도 불리운다.
지신밟기는 집안의 가신(家神)을 위하고 송축함으로서 일년 동안의 복을 빌고 축사(逐邪)를 기원하는 민속이다.
또한 단순히 초복축사(招福逐邪)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뛰어 놀고 즐기면서 한 민족이라는 공동체 사상을 창출해 내기도 한다.
지신밟기의 기원은 언제부터라고 문헌에 명시되어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주위의 사실을 볼 때,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진 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송탄의 지신밟기는 6·25전까지만 해도 마을의 두레농악대가 정월 초부터 집집마다 다니며 각 가정의 지신(地神)을 눌러 일년간의 초복축사(招福逐邪)와 육축번식(六畜繁殖), 풍년의 기원, 자손창성(子孫昌盛) 등을 발원(發願)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송탄의 지신밟기는 어느 특정한 지역에만 국한되어 나타났던 것이 아니고, 각 마을마다 농악대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축원(祝願)을 해 주고, 받은 전곡을 이용해 마을의 공동 우물을 파거나 아니면 도로(道路)를 보수하고, 마을의 동제(洞祭)에 사용하는 제기(祭器)나 농악기를 보수하고 바꾸는데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송탄에서 마을마다 농악이 있어 지신밟기가 활발하게 연희(演戱)되던 이유는, 가까운 평택군 진위나 안성군 등에 예로부터 남사당패(男寺黨牌)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마을의 농악이 활발하게 연희되었다.
위와 같이 연희되던 지신밟기가 일제 치하의 문화말살정책때 유기그릇의 공출(供出)로 쇠(釗), 징 등을 수거하자 한때 중단이 되고, 광복후에 급격히 밀어닥친 서구문물(西歐文物)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쇠퇴하였다.
요즈음에 송탄의 지신밟기는 거의 볼 수 없고 다만 몇 개의 마을에서 동리의 노인들에 의해 연희가 될 뿐이며, 그것도 지신밟기이기보다는 걸립(乞粒)의 형태로 집집마다 다니며 문 앞에서 잠시 동안 연희되는 모습만을 볼 수 있다.
기(旗) 싸움
기(旗) 싸움은 마을과 마을의 두레농악대가 농사 일을 하기 위해 풍물을 치며 길을 가다가 길에서 서로 만나거나 아니면, 정월의 명절을 맞이하여 마을의 두레농악대가 서로 모여서 기세배(旗歲拜)를 올리는 가운데서, 대동(大洞)의 농악대가 자신의 마음을 과시하기 위한 방법으로 상대방의 농기(農期)에 달려들어 꿩장목을 빼앗으려고 서로 다투는 승부성 민속이다.
농악이 활발하게 연희되었던 송탄에서는 기싸움이 매우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송탄의 거의 전역에서 6·25동란 전까지만 하여도 마을마다 조직되어 있는 두레농악대가 다니면서 작업을 하며, 서로 이웃의 농악대와 꿩장목을 빼앗으려고 심한 몸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도일동 하리와 원도일, 이충동 동령리와 안골 진위면 일대, 지산동과 건지 등에서 심하게 다투었다고 하며, 과거에는 놀이라기보다 기를 갖고 싸우는 승부성 민속이었다.
송탄의 기싸움은 한창때는 하루에 몇 군데가 동시에 기싸움을 벌여 나중에는 대동(大洞)의 많은 인원이 지나가면 타동(他洞)에서는 아예 싸움을 피하기 위해 먼길로 돌아다녔다고 전하는데, 6·25때까지도 흔히 볼 수 있던 것이 그 후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전한다.
한참 심하게 기싸움을 할때면 과열이 되기 때문에 이성을 잃고 농기는 물론 농악기까지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고 하며, 한번 농기를 빼앗기면 도로 찾아오기에 여간 애를 태운 것이 아니라고 전한다.
백중(百中) 놀이
음력 7월 15일을 백종일(百種日), 백중절(百中節), 망혼일(亡魂日), 중원(中元)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이 날이 되면 남녀가 서로 모여, 온갖 음식을 갖추어 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겼다.
백중이 되면 씨름대회가 지방마다 열리게 되며 특히 장에는 백중장(百中場)이 서게 되는데, 이 백중장은 백중을 전후에서 열리게 되며 머슴을 둔 집에서는 이 날 하루를 쉬면서 장에 나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도록 새 옷도 한 벌 지어주고 돈도 넉넉하게 주는데 이 돈을 백중전(百中錢)이라고 하였으며, 이 백중절을 머슴날이라고도 부른다.
송탄의 백중놀이는 서정리에서 7월 백중을 전후해 3~4일 정도 난장을 벌이며, 인근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장을 보고 한쪽에선 술과 음식을 먹고 즐기며 농악대회와 씨름, 그네뛰기 등이 벌어졌다. 이 때는 20리 안팎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어 즐겼으며, 특히 씨름판에는 총각마구리, 황소걸이 등으로 인해 타지역의 사람들도 성시를 이루었는데, 30~40년 전만 하여도 농토가 많았던 인근에서는 백중날이 되면 농사꾼들이 모여서 즐기면서 하루를 보낸다. 백중 때가 되면 장사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저마다 난장을 트고 서로가 좋은 장소를 차지하려고 법석을 피웠으며, 한쪽에선 씨름판이 벌어지고, 한쪽에선 내기 윷놀이와 장기 등이 벌어져 고함을 치고 농악대가 서로 재주를 내세워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며 즐겼고, 장에 모인 부녀자들은 널뛰기로 하루를 보냈다.
송탄 서정리의 백중놀이는 이미 재현된 고장처럼 특별한 놀이는 없었지만, 농악대가 도착하면 한 군데 모여서 먼저 우물에 가서 샛굿 축원을 한 후에 장사를 하는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밟기를 해주고 씨름판으로 가서 자기 마을 사람들이 이길 수 있도록 흥을 돋아주고는 했다.
거북놀이
거북놀이는 영물(靈物)이고 장수동물(長壽動物)인 거북을 신격화(神格化)하여 신성시하는 8월 한가위의 놀이로써, 8월 보름의 달빛 아래서 수수 잎을 엮어 거북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집집마다 다니며 복을 빌어주고 액을 막아주는 초복축사(招福逐邪)의 기원(祈願)의 댓가로 전곡(錢穀)을 받아서, 마을의 이익이 되는 공동의 사업에 사용하는 기호지방(畿湖地方)의 대표적인 놀이로써, 거북을 위함으로 인간이 초복축사와 무병장수(無病長壽) 그리고 풍년을 구가하는 기원성 민속의 하나이다.
송탄에서는 30~40년 전까지만 하여도 마을마다 청년들이나 어린 소년들이 수수 잎으로 거북의 모습을 만들고 각자의 몸에 수수 잎을 두르고 떼를 지어 집집마다 다니며 거북놀이를 즐겼는데, 중단 된지가 오래되었고 또 중단되기 전에는 이미 아이들의 유희로 변해, 거의 모든 마을에서 연희가 되었으면서도 그 자세한 놀이과정이나 연희의 이유 등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어느 마을이나 매우 활발하게 연희가 되었던 거북놀이가 단지 해학적인 모습만 갖고 즐기지 아니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즐기던 중 거북이가 쓰러지고 그 거북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청원하여 먹을 것을 주면 일어서서 신나게 한바탕 뛰어 놈으로써 앞의 거북놀이의 창출 목적에 맞게 연희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송탄 전체에서 연희되던 거북놀이가 이제는 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地硬 다지기
지금처럼 건축공법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집을 짓는데 있어서 시멘트를 이용한다던가 하는 식의 방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선인(先人)들이 생각해 낸 지혜가 커다란 돌을 줄로 엮어서 여러 가닥의 줄을 빼내어 그것으로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가 힘껏 땅에 내리 다져서 지반을 단단하게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기초작업에 준하는 지경(地硬)다지기로, 말 그대로 땅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 지경다지기는 대개 마을에 새로운 집이 들어서면, 마을의 주민 전체가 참여해 함께 일하여 이웃을 돕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의 민속이기도 했다.
송탄은 바다가 가깝고 진위천, 황구지천 등 큰 내가 주위에 흐르고 있어 지반이 무르고 약한 연약 지반이 많은 곳이다. 또한 수맥(水脈)이 좋아서 어디를 파나 쉽게 물이 나오는 곳으로, 이 지경다지기가 꽤나 성행한 곳이기도 하다.
송탄의 지경다지기는 도시로 변하기 이전의 20~30년 전만 하여도 어디서나 터주고사를 재고 난 후에 이 지경다지기를 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고증으로는 이 지경다지기는 땅을 단단하게 할 뿐만 아니라 터주신을 눌러 동티를 막는 뜻도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여러 곳에서 지경돌로 사용했던 돌을 볼 수 있다. 이는 최초까지도 지경다지기를 했다는 뜻이며, 6·25동란 후만 하더라도 이 지경다지기를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다른 민속이 징이나 쇠를 공출 당해 농악이 없어지면서 많이 쇠퇴하고 단절되었지만, 지경다지기는 생존에 필요한 집을 짓기 위한 방법으로 연희되었고 더욱 농악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비교적 변화가 없이 전승되던 거싱 집을 짓는 건축법이 바뀌면서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민요 : 민요와 속요/농요/의식요/부녀요
민요와 속요
민요는 민중들이 그들의 생활 속에서 감정을 직흥적으로 소박하게 부른 노래이다.
눈물 지며 한을 달래고 기쁨에 넘쳐 흥나는 데로 불렀으니 민요에는 민중들의 생활과 감정이 거울처럼 반영되어 있다.
이 민요가 요즘들어서는 어느 특정지역에서 정착한 전문적인 소리꾼에 의해서 불려지면서, 시대가 변하고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체계적인 전수 방법과 정해진 선율이나 사설로 인하여 전승에 어려움 없이 불려지고 있다.
속요와 비교하여 국어 대사전에서는 ‘속요보다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임’이라고 적고 있어, 선율이나 사설의 변화가 거의 없이 전승되고 있는 민중의 노래하고 말한다.
여기에 비해 삶의 현장에서 표출되고 있는 소리인 모심기소리, 김매게소리, 회닺이소리, 물레소리등은 창작가 바뀌면 그 선율이나 사설이 바뀌어 민요의 전체적인 설명에 맞지 않으며, 체계적인 전수 방법에 의해서 전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 잠정적인 기억속에 있다가 필요시에 표출되는 것으로 그 선율이나 사설은 변화가 없다는 뜻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고, 기존의 설정된 전문가에게서 불려지는 민요에 비해서 그때 그때 변하는 속성을 띄고 있어 속요(俗謠)로 보아야 한다.
이 속요가 어느 시기에 한 지역에 정착하여 체계적인 전수방법에 의해서 전승되는 소리로서 정해진 사설이나 선율의 정착과 전문적인 소리꾼에 의해 보존 전수가 되는 것을 민요라고 볼 수 있다.
농요(農謠)
농요는 농사를 할 때 부르는 작업요(作業謠)로써 가창목적(歌唱目的)을 보면, 작업의 능률을 높이기 위함과 통일된 동작의 창출과 오랫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농작(農作)에 있어서 일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표현되는 소리였다.
농요는 거의가 공동체(共同 )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창출되었으며, 특히 선창자(先唱者)의 기능에 따라서 많은 변화를 나타내게 된다. 농요는 모찌는 소리, 모심기 소리, 김매기 소리, 타작 소리, 나비질 소리,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 소리마다 각기 독특한 선율과 사설을 보이고 있는데, 내용은 ① 豊年의 祈願 ② 자기의 신세타령 ③ 家內의 安寧의 祈願 ④ 情謠 등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송탄은, 예전에는 農業이 주업으로 행해졌으나 도시화되면서 농요는 나타나지 않고 일부 외곽지여고가 평택군 진위, 서탄, 고덕 쪽에서 조사되고 있으며, 거의가 몇 사람의 기억에 의해서 사설이 정리되고 있으므로 선율 또한 기억하는 이가 드문 실정이다. 이러한 이유는 요즈음의 농사가 대부분 기계화 영농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농촌에 수요를 전수 받을 젊은층이 없어 전수가 되기 전에 소리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1) 모심기謠
① 송탄 서정동 갈평 마을의 노인회관에서 조사된 모심기요는 일반적으로 경기남부에서 나타나는 모심기 소리인데 ‘여기도 심었네 저기도 심었네’로 선·후 소리로 구분되고 있으며, 선소리가 사설이 변화하는데 비해 받는소리는 같은 사설로 받는다.
② 고덕면 당밑 마을은, 현재 농사를 짓고 있으며 마을 당제를 지내는 곳이다. 농요는 거의 잊혀진 상태이며, 마을회관에서 조사된 바로는 모심는 소리는 선·후 소리가 나뉘어지지 않으며 그냥 노랫 가락에 맞추어서 부른다고 한다. 대개 모심기소리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농지가 넓은 곳이면 많은 사람이 작업을 하기 때문에 선·후 소리가 있으나, 논이 넓지 않으면 한사람씩 돌려가며 소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당현리 당밑 마을의 경우에도 농지가 넓지 않아서 단순한 노랫가락조의 모심기요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천백식옹(71세. 당현리 344번지)에 따르면 거의가 ‘해는져서 어두운데····’의 사설을 많이 부른 것으로 나타난다.
③ 지산동 노인회관에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지산동은 한 때 농악대가 매우 성행하였으며 ‘여기도 또하나 오하 저기도 또하나’를 부르며 6·25무렵까지 생존해 있던 소리꾼 방처녀에 의해서 많은 소리가 가창되었다고 한다. <메김소리> 여기도 또하나 오하 저기도 또하나 <받는소리> 여기도 또하나 오하 저기도 또하나
④ 칠원동에서는 김매기요는 방아타령, 상사디야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모심기소리는, 원칠원에서는 ‘여기도 꽂고 저기도 꽂고’를 부르고, 수촌마을에서는 ‘여기도 하나 저기도 하나’를 불렀다고 한다. 같은 지역의 소리로 ‘여기도 하나 저기도 하나’의 사설이 송탄, 안성, 용인, 평택, 화성 등지에서 공통적으로 불러지는 가장 보편화된 모심기소리다.
2) 김매기謠 김매기요의 경우에는 초벌, 이벌, 세벌의 경우가 각기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여 초벌때는 ‘어허라 굼실 단허리야’로, 두 번매기는 ‘얼럴럴 상사디야’로, 세벌매기는 <삼호장>이라고 부르는, 길게 소리를 끄는 ‘방개타령’이 주로 불러졌다고 하지만 요즈음에는 소리가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실정이며, 70세 이상된 노령자에 의해 몇구절씩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평택군의 경우에는 아직도 여러 곳에서 농요가 채록되고 있는데 비해 송탄시는 외곽지역의 농사를 짓고 있는 마을에서도 20~30년을 전후해 소리가 단절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는 해방후부터 도읍된 서구문물의 영향이나, 10여년 전부터 기계화 영농방법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소리가 점차 소퇴하기 시작하였는데, 최근에는 젊은 인력들이 수익성이 좋은 특수작농이나 기타 축산 등으로 변경하고 많은 인력이 농공단지 등의 공업화된 직장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농촌의 환경이 변화되어 소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산동에서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농요가 맥이 끊어져 버렸으며, 마을에서는 겨우 마을회관의 노인들에 의해 ‘얼럴럴 상사디야’의 김매기요만 불려지고 있다. 상사디야 소리는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보편화된 소리로써, 선창자가 한구절을 메기면 많은 사람들이 후렴을 받으며 부르는 소리이다.
중앙동 서정역 근방의 김매기요의 경우 ‘어허라 굼실 단허리야’의 단허리, 대허리 등으로 불리는 농요를 초벌매기에 사용했으며, 두벌매기는 ‘어럴럴 상사디야’의 상사디소리로 많이 불러졌다고 한다. 현기천옹(18세)에 의하면 중앙동 일대에서는 단허리가 매우 성행하였으며, 장봉국옹(66세. 서정동 24번지)은 상사디소리가 매우 많이 불러져서 초벌매기 때도 상사디를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한소리가 초벌이나 두벌매기에서 공통적으로 불려지는 이유는, 점차 소리가 쇠퇴하고 전문적인 소리꾼이 자연도태(自然淘汰=死亡)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송북동 건지와 동막 등에서도 김매기요는 모두가 ‘상사디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흔히 마을에 전문소리꾼이 없으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소리가 상사디소리로, 이것은 비단 송탄 뿐만 아니라 경기도 전체의 보편적인 형태이다.
의식요(儀式謠)
의식요는 속요 중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된 사설(辭說)을 갖고 있다.
이 의식요의 경우에는 죽은 이의 고뇌와 회한 그리고 불효로 인한 후회, 저승길의 외로움 등을 표현한 상여소리와, 사람이 사는 집과 죽어서 영원히 거하는 유택(幽宅)이 명당(明堂)이기 때문에 그 음덕(陰德)이 자손에 미쳐 자손이 부귀(富貴)와 창성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희다지 소리, 그리고 지신밟기나 거북놀이 등에서 나타나는 고사덕담(告祀德談)이 이 의식요에 속한다.
송탄에서는 다른 속요에 비해 이 의식요가 많이 채록(採錄)되었는데, 그 이유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사설이기 때문에 기억을 하고 있으며 현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의식요의 경우에 그 선율이나 사설이 거의 정해져 있으며, 요즈음에 들어서 새로운 풍속인 전문 소리꾼이 생겨 그 소리꾼들에 의해서 소리가 불려지기 때문에 창자(唱者)나 지역적(地域的) 특성보다는 획일적인 사설과 선율로 전승되어 표현되고 있다.
상여소리 아직도 전수도고 있는데 비해 고사덕담은 지신밟기나 거북놀이가 중단되면서 함께 쇠퇴하였다.
부녀요와 기타
부녀요는 內房歌謠 혹은 閨房歌謠라고도 부르며, 노래의 종류에는 작업요인 베틀소리, 물레소리, 밭매는 소리 등이 있고 自嘆歌인 시집살이 노래, 첩요(妾謠), 신세타령요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아이들을 어르며 부르는 자장가와 애 어르는 소리 등이 이에 속하는데 송탄에서는 거의 조사 되지 않고 있으며 송탄 외곽 일부 지역과 평택에서 간간히 조가될 뿐이다.
남자들이 주로 부르는 작업요인 농요와 의식요인 상여소리 등이 거의 잊혀 졌다고 하지만 꽤 조사가 되는데 비해, 부녀요는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어도 거의 조사가 되지 않고 있다.
이 밖에 오락요나 아이들이 부르는 아동요등은 상당히 많이 채록되고 있다.
가신신앙 : 터주/성주/제석,칠성,삼신/업/금줄/기타
터주
터주는 집터를 관장하는 신으로 동서남북 중앙의 신이며, 집터의 안전과 집을 보호하는 신으로 상징된다.
흔히 터주를 터주대감. 터주 신. 후토주임 등으로 부르는데, 터주대감이나 터주 신은 터를 관장한다는 뜻에서 붙은 명칭이며, 후투 주임은 터주 신이 좌정하는 곳이 집 뒤켠의 장독대 옆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이충동 동령마을 박성대(남, 47세)의 터주가리는 집 두 켠 장독대의 좌측 담장 밑에 좌정하고 있다. 이엉을 엮어 두른 짚 가래가 부실해 안에 단지가 밖으로 내보인다.
터주고사는 부녀자가 주관자가 되어서 지내는데, 주부 변경순에 의해 음력 10월이 되면 단지 안에 볍씨를 새로 집어넣고 옷을 갈아 입힌다(가리를 새로 한다). 안에 든 벼는 여름에 꺼내어 방아를 찧을 때 함께 찧어서 먹는다.
또 명절 때 집에서 떡을 하면서 먼저 터주 앞에 갖다 놓았다가 먹는데 이는 터주신을 위하고자 하는 이유에서다.
서정동 강순희(여,60세) 터주가리는 대문을 들어서 우측으로 돌아서면 담의 구석에 좌정해 놓여 있다.
주부인 강순희는 女巫로서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일반 가정의 터주가리와는 달리 터주가리 중간에 금줄을 띠고 부적을 붙여 놓았다.
이 집의 터주가리 안에는 작은 단지가 있고 안에 콩 세되 세 홉을 집어넣는데, 음력 10월이 되면 단지 안에서 콩을 꺼내어 밥을 할 때 함께 얹어서 콩밥을 해먹고, 새로 콩을 사다가 햇콩으로 집을 넣는다. 콩을 바꾼 후에는, 옷을 새로 입히고 터주가리 앞에 떡과 고기를 놓은 다음, 막걸리를 따르고 가정이 일년 내내 평안한 것을 감사하는 덕담과 내년에도 탈 없이 잘 지내게 해 달라고 빈다.
송북동 650번지는 윗건지가 된다.
이 마을에 사는 김주웅의 집 뒤편 장독대에는 터주가리와 업가리를 모셔 놓았는데, 이 집의 터주가리는 높이가 70cm정도이며 안에는 작은 단지에 결실이 좋은 볍씨를 넣어 두었다가 가을에 새로 볍씨를 갈아넣고 , 터주가리의 주위를 깨끗이 청소한 다음 볍씨를 꺼내 �어서 식구들이 밥을 해 먹고 , 새로 볍씨를 넣은 후에 옷을 해 입힌 다음 떡을 해 놓고 터주고사를 올린다.
김주웅 집에는 자녀는 다 서울로 가서 살고 부모 내외만 사는데 김주웅의 어머니 홍남표(71세)가 주제가 되어 지낸다. 이 집의 터주가리는 여느 곳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터주가리의 위에 흡사 여인네의 머리처럼 짚을 털어 얹어 놓았다.
成主
성주는 上樑神이라고도 한다.
대개 대들보 위나 대청마루의 기둥에 좌정해 집안의 모든 신을 관장하며, 혹 ‘成主大監’이나 ‘成造’라고도 하는데 성조는 집을 짖는 법을 사람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성조신에서 왔다고도 하고, 하늘을 뜻하는 ‘上主’에서 온 말이라고도 한다.
이충동 동령 마을 김용진(90세), 용재(76세)가의 성주는 집을 새로 짓고 맞이하였으며, 동생 김용재의 집에서는 10월이 되면 떡을 하여 집의 곳곳에 놓고 비손을 하였으나, 10여년 전부터 중단되었다고 한다.
帝釋, 七星, 三神
제석은 원래 도리천의 임금이며 하늘의 수호신으로 불법을 보호하는 신이지만, 巫歌의 제석 풀이를 보면 인간에게 복을 점지해 주는 신으로 특히 子孫昌盛을 주관하는 신이다.
제석은 쌀을 항아리에 담아 놓거나 밥 주발에 쌀을 담고 한지로 덮어놓기도 하고 제석 주머니를 만들어 쌀을 담아 벽에 메달아 놓기도 한다.
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도교에서 말하는 탐랑, 거문·녹존·문곡·파군의 일곱별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人物摘奸과 수명 장수를 책임진다는 신이다. 칠성의 신표는 집 뒤켠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거나 돌 일곱 개를 놓아서 칠성의 신위를 만들기도 하는데 , 칠월칠석이 되면 집안의 부녀자가 밤에 정화수를 떠놓고 촛불을 켠 후 북극성을 향해 빌면서 가족들의 건강과 수명 장수를 축원한다.
삼신은 흔히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삼위를 삼신이라고 한다하나, 삼신할미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産神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신은 産室이 안방이기 때문에 안방의 문 위나 안방의 시렁위에 봉안하는데, 베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 쌀을 넣고 허리를 묶어서 매달아 놓기도 하고, 쌀을 주머니에 담아서 두 개를 벽에 걸어 놓기도 한다.
이충동 동령마을 박성대(남,47세)의 집에는 안방에 제석 주머니가 두 개 걸려 있다.
가을이 되어 햅쌀이 나오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다음해 7월7석 날 아침에 쌀을 꺼내어 밥을 짓고 미역국을 끓여서 제석주머니를 달았던 자리 밑에 갖다 놓은 후 먹는다.
이 쌀이 다 없어 질 때까지는 다른 쌀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 밥은 개 같은 짐승을 주어서도 안되고 오직 집안식구끼리만 먹어야 한다.
業
흔히 ‘業位王’이라고 하는 업은 집안의 복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곳간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한다.
업의 신위는 커다란 단지에 콩을 넣고 그 위에 짚을 덮어두기도 하고, 단지에 잡곡을 넣어서 방안의 장롱 옆이나 시렁 위에 놓기도 한다.
뱀이나 족제비는 이 신의 심부름꾼으로 보기도 한다.
송탄의 경우 업왕신의 신위는 집 두켠 장독대 옆에 터주가리와 함께 세우는데, 업가리는 터주가리 보다 크게 만든다.
터주가리가 높이 70cm∼100cm정도에 밑둘레가 70cm∼100cm인데 비해, 업가리는 높이가 130∼170cm가 되며 밑 둘레가 120∼150cm쯤 된다.
禁줄
한국인에게 금줄의 존재는 매우 신성한 것으로서 어느 장소이든지 금줄이 쳐지면 그 곳은 매우 신성한 곳으로 상징하고 있으며, 금줄의 신앙은 신의 형태는 정해지지 않지만 그 나름대로 집안에서 가내의 안녕이나 혹은 재액의 방지를 위해서 나타나고 있다.
大監단지
대감단지는 일종의 영웅 신앙으로서 인간의 죽은 영혼 가운데 왕이나 장군 또는 막강한 권좌에 앉아 있던 것을 모시는 것이다.
이들 영웅신은 대개 마을과 당의 주인으로서 마을 굿의 실체가 되지만 집안에 모셔들일 때는 동제의 신위와는 다르게 큰 단지나 항아리에 쌀을 담아 놓는 모습으로 변화하는데, 신격 역시 영웅의 신이 아닌 가정을 보호하고 풍년을 돕는 일종의 가정의 수호신의 기능을 갖게 된다.
이충동 동령의 김용재家의 대감항아리는 마루 한 구석에 좌정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쌀독과 구별하기조차 어렵다.
주부 이인해(75세)에 따르면, 살을 항상 가득 채워 놓는다고 하는데, 이는 항상 집안에 풍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보아야 할 곳이다. 대감항아리에 넣어 둔 쌀은 집안에 일이 생길 때면 꺼내어 떡을 해 먹는다.
福조리, 祈子신앙
섣달 그믐날 밤에서부터 정월 초하루 새벽에 복조리를 사서 집안의 기둥에 걸어 놓으면, 그 해에 복이 집안에 가득 들어온다고 하는데, 이른 시간에 조금이라도 먼저 사면 살수록 많은 복이 들어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기자 속은 바위와 관계가 맺어진다. 흔히 큰바위나 암석, 마을에 있는 선돌, 마을의 대상으로 섬기는 미륵 등이 그 가자 속의 신앙물로 나타나는데, 대개는 작은 돌을 던져서 바위에 붙게 되거나 미륵이나 선돌등에 얹혀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서낭신앙
서낭은 ‘山王, 先王’의 와전이라고도 하나 동이의 어구나 산등성이에 神木과 累石塚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행인들의 행로의 무사함과 부녀자들이 기자축원(祈子祝願) 또는 무격의 신앙대상으로 많이 이용되어 왔다.
도일동 삼거리의 서낭목은 오래 묵은 엄나무로 한쪽가지는 이미 죽어 버렸고 예전에 이 길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행로의 무사함을 빌기 위해 던진 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나무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10여년 전만 해도 더러 섬기는 사람들이 부녀자들 중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찾아 볼 수 없다.
이충동 돌령 마을의 서낭목은 동령에서 안동령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분기점에 있으며, 이 서낭복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녀자들이 기자축원을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굿 : 갈평 산신제/도일 산신제/원칠원 산신제/모곡마을 산신제/동천리 산신제
갈곶리 성황제/ 지장절 당제/게루지 당제/당현리 당제/동령마을 용왕제
동막마을 井祭
마을 굿(洞祭)
단군 조의 신단수에서의 제천의식과 삼한 조의 천신제로서 정착된 마을 굿 중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등은 다 소도제에서 비롯되었으며 집단축제로 나타나는 종교적인 의식으로서 마을 단위의 신앙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송탄의 마을 굿은 30여년 전부터 50년전쯤 중단된 마을이 대부분이었다. 현재(1993년 기준)는 동령의 용왕제등 몇 개 마을만이 제를 거행하고 있으며 이도 거의 간소화되어 있는 상태다.
①서정동 갈평마을 산신제
·제의 종류:산신제
·신위의 형태:산신대왕비
·제장의 위치:마을의 동산위
·현존여부:수백년동안 계속
·제의 일자:음력9~10월중
·제수비용:가가호호
·제의 순서:
강신-분향-헌작-고축-송신-소지
·제보자:고인섭(남75세,서정동 갈평마을)
이 곳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의 뒤에 있는 동산의 산신당 터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산신제단은 전에는 산의 윗편에 평탄한 땅을 골라서 사용하였으나 없어지고, 마을에서 산신당을 짓기로 하고 자금을 거두었으나 부족하여 산신당임을 알리는 높이 2자 정도의 비석을 세우고 그 주위에는 시멘트로 기초를 다져 블록으로 1칸 정도를 쌓아 둘러놓았다.
산신제의 음식을 준비하는데 사용되는 물은, 산신당에서 고덕으로 나가는 포장도로를 건너서 장원이라는 음식점의 마당에 있었으나, 음식점이 들어서면서 그것을 뭍어 버리고 대신
과수원 앞 논 가운데의 웅덩이를 깨끗이 청소하여 그 물을 이용한다.
제가 끝나고 나면 음식은 방액(防厄)이 된다고 하여 집집마다 골고루 나누어준다.
②도일리 상리 산신제
·제의 종류:산신제
·신위의 형태:산신당(덕암산 산신)
·제장의 위치:도일동 안골 덕암산 중턱
·현존여부:오래전부터(연대 미상)
·제의 일자:음력10월중 택일
·제수비용:집집마다 염출
·제의 순서:강신-헌작-분향-고축-소지
·제보자:원필의(남,73세,도일동 하리)
도일동은 덕암산 밑에 있는 마을로서 상리. 내리. 하리. 사창. 안골. 암말. 갑골의 자연 부락이 모여서 형성되었다.
이 곳은 원주 원씨들이 경기도 양주에서 이주하여 18대째 이어 가고 있으며 마을에서 전하는 이야기가 도일동이 석씨 천년, 소씨 천년, 원씨 천년의 명당으로 정해진 곳이라고 하는데 현재(1993년) 석씨는 없고 소씨만이 인근에 몇집 있으며 원주 원씨들의 집성촌이다.
도일동의 산신제는 상리 한 곳에서만 지내는데 안골에서 덕암산으로 오르다 보면 하천을 끼고 밤나무 단지가 있고 조금더 오르면 폐절이 보인다. 이 암자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우측에는 제물을 준비하는 주방으로 쓰는 블록 건물 한 칸이 있고, 좌측길 밑에는 제물을 요리하는데 쓰이는 샘이 있다.
극소을 지나 50여m정도 더 올라가면 산신당이있다. 산신당 내부에는 정면에 위패와 제물을 진설할 수 있는 높아 1m정도의 상이 있고, 상위에는 촛대와 향로가 놓여 있으며, 우측에는 제기와 촛곽, 양동이 등이 잘 정돈되어 놓여 있고 벽에는 복조리가 걸려 있다.
③도원동 원칠원 산신제(山神祭, 井祭)
·제의 종류:산신제,정제
·신위의 형태:산신당내, 산신도, 공동우물
·제장의 위치:마을 동산의 산신
·현존여부:6.25후에 중단
·제의 일자:매년 음력10월중 택일
·제수비용:각호 마다 염출
·제의 순서:산신제 2곳, 정제 1곳에서
강신-헌작-분향-고축-송신
·제보자:조성대(남,76세,도원동)
현재(1992년) 도원동 동사무소가 있는 七院은 예로부터 삼남대로의 길이었으며 驛院이 있던 곳으로 원곡, 평택 등지로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이곳은 일찍부터 새마을 운동을 시작해서 비교적 일찍 어려운 농촌 생활을 벗어난 마을이다.
6.25때 무너졌다는 산신당 안에는 벽에 산신도가 그려진 탱화가 1점 있었고, 그 앞에는 상위에 흙으로 만든 말이 있었다고 한다.
대개 산신당이나 별신당 혹은 도당집 등에서 말을 섬기는 것은 마을의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대개 행로의 무사함을 빌기 위함이라고 할 때 이 산신당이 마을이 있는 길 가까이에 있고 당 옆에는 고목인 참나무가 한 그루 있었을 것으로 보아지며 산신당과 서낭당의 복합적인 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④동부동 모곡마을 산신제(山神祭, 井祭)
·제의 종류:산신제, 정제
·신위형태:산신당
·제장의 위치:마을뒤 동산 중턱
·현존 여부:10여년전 중단
·제의 일자:음력 정월중 택일
·제수비용:집집마다 염출
·제의 순서:강신-헌작-고축-송신-소지
·제보자:이현수(남,75세,동부동 모곡)
송탄의 동부동 일대가 공단으로 조성되면서 가장 많은 농지와 과수원등을 공단 부지로 내어 주고 이제(1993년) 68가구 120여 세대가 남아 있는 모곡 마을은 전주 이씨들이 450여년 전에 이주해 정착했다고 하며 현재 그 16대 손이 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현재는 공단의 조성으로 동산을 깍아 평지가 되어 버렸지만 그 동산에 산신당이 있어 10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매년 음력 정월이 되면 산신제를 드리고 음력 7월에는 정제를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전주 이씨들이 이주 당시 심었다는 수령 450여년 되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옆에는 전주 이씨들의 사당이 있었으나 사당도 공단이 조성되면서 포천으로 옮겨지고 산신당도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⑤진위면 동천리 산신제
·제의종류:산신제, 정제
·신위의 형태:당집과 샘
·제장의 위치:마을의 뒷산
·현존 여부:현재는 중단
·제의 일자: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제수비용:마을에서 염출
·제의 순서:강신-분향-헌작-고축-소지
·제보자:홍석천(남,69세,진위면 동천리)
동천리는 진위면의 동북부 쪽에 위치한 마을로 해방 후까지만 해도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은산리, 가곡리 마을과 함께 여러 마을이 풍물을 앞세우고 모여서 줄다리기를 하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용인군 남사면과 군계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경부 고속도로 가까이 접하고 있으며 오산이나 하북에서 들어갈 수 있다.
동천리에서는 예로부터 음력 10월이 되면 상달이라고 하여 마을의 산에 있는 당집에서 산신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중단하고 당집은 무너져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⑥진위면 갈곶리 성황제(城隍祭)
·제의종류:성황당제
·신위의 형태:당집안에 위패를 모심
·제장의 위치:갈곶리 물탱크 앞
·현존여부:매년지냄
·제의일자:음력 10월 초하루 밤 11시경
·제수비용:각 가정에서 추렴
·제의 순서:강신-분향-배례-고축-소지
·제보자:김씨(여,81세), 송태원(남,58세)
이마을은 요즘들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오산시의 경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갈곶 1,2리를 합치면 700세대가 넘는 대단위 밀집 취락이다.
이곳의 당집은 현재 천장이 뚫어져 있으며 상량목에는 단기4286년 계사 구월 구일 증수라고 적어 놓아 개축한지가 40년이 넘었음을 알 수 있고 상량목에는 지난해 제가 끝나고 매달아 놓은 북어와 실타래가 있으며 당집문을 열면 맞은 편에 城隍大神이란 位板이 걸려 있어 이 당집의 주제신은 서낭신임을 알 수 있다. 제단은 시멘트로 발라 놓았고 당집 안에는 위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⑦서정동 지장절 당제(堂祭)
·제의 종류:당제
·신위형태:당집 1칸(당할아버지, 당할머니)
·제장의위치:마을 고개위
·현존여부:100여년 전부터 현재까지
·제의일자: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제수비용:각 가정마다 염출
·제의 순서:강신-헌작-분향-소지
·제보자:이흥재(남,65세,서정동)
지장골의 당제는 마을의 안녕과 번성, 풍농을 위해 지내기 시작했으며 매년 음력 9월 말이 되면 마을의 주민들 중에서 생기 복덕을 가려 제주를 선정한다.
제주는 집안에 산모나 노인등이 없고 부녀자들이 제가 끝 날 때까지 달거리를 거치지 않을 사람을 엄선하고 제주로 선정된 사람은 그 날부터 문밖 출입을 삼가고 잡인을 집안에 들이지 않으며 살생을 금하고 비린 것과 날것을 먹지 않고 근신한다.
제물을 준비하기 위한 우물은 당에서 남쪽 밑으로 150m 떨어져 있으며, 예전에는 4개가 있었으나 다 폐쇄되고 한 곳만 남아 있다.
전에는 평지와 똑같이 되어 있었으나 토관을 붙이고 샘 안에는 파이프로 연결하여 지금도 사용하는 집이 있다.
⑧고덕면 두릉2리 게루지 당제
·제의 종류:당제
·신위의 형태:엄나무등 고목
·제장의 위치:마을의 진입 포장도로 우측
·현존여부:매년 두 차례 거행
·제의 일자:음력 정월,7월초3일
·제수비용:마을기금 이용
·제의 순서:강신-헌작-고축-송신-소지
·제보자:현영식(남,60세,두릉 2리)
게루지는 전통 깊은 마을로 송탄 미군부대 후문에서 두릉1리를 거쳐 청북으로 가는 아스팔트 포장길을 조금 지나면 좌측 길 옆으로 게루지 마을이 있고 우측에 엄나무등 4-5그루의 거목이 서있다.
이 나무가 당나무로 게루지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과 7월 초3일에 당나무 아래 제상을 진설하고 당제를 지낸다.
이 마을에는 원래 위하던 당나무는 없어지고 대신 주위에 있던 거목을 당신으로 위하고 있으며 정초가 되면 마을의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서 제주를 선정하는데 제주는 집안의 여자가 달거리를 치루면 안되므로 나이가 많은 노인을 선정한다.
제의식은 일반적인 기제사와 같은 방법으로 지내며 제가 끝나면 마을의 안녕과 각 가정의 안과 태평을 비는 소지를 올린다.
⑨고덕면 당현리 당제
·제의종류: 당제(산신제당)
·신위의 형태:당산의 산신(산신당)
·제장의 위치:당현리 중앙 당산의 산 중턱
·현존 여부:500년 이상 지냄
·제의 일자:음력 7월 초사흘중 택일
·제수비용:각 가정마다 염출
·제의 순서:강신-분향-헌작-고축-송신-소지
·제보자:천백식(남,71세,당현1리)
이 곳에는 500여 년부터 마을에 주민들이 들어와 設村했다고 하는데, 당현리의 산신당제를 고증한 원주민 천백식옹(71세)의 가계가 이 곳에서 17대 손을 이룬다고 하여서 이 마을의 역사가 540여년 정도임을 알 수 있으며, 이 마을의 이름을 당 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지어진 것이 설촌 당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 당현리 에서는 당밑과 상막금 내천 하막금에서 매년 마을의 중앙에 있는 당산의 당에 모여서 사신당제를 지내고 있다.
당제는 당밑에 따로 지내며 나머지 상막금, 내천, 하막금은 함께 모여서 지내는데, 당은 같은 당을 이용하고 있어서 서로 다른 날을 택해 제를 지낸다.
⑩이충동 동령마을 용왕제
·제의 종류:용왕제(샘굿)
·신위의 형태:공동우물(용왕신)
·제장의 위치: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공동우물
·현존여부:400여년간 계속
·제의 일자:매년 을력 정월 초진일(初辰日)
·제수비용:집집마다 염출
·제의 순서:강신-헌작-고축-소지
·제보자:박희복(남,66세,이충동 동령)
샘굿은 흔히 龍王祭, 龍神祭, 우물告祀, 샘告祀 등으로 불리우며 전국적으로 나타나던 마을 동제다.
과거에는 마을 마다 한 개 혹은 2!3개의 공동 우물을 이용해 마을 전체의 식수원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자연 물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만큼 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
동령마을에서도 마을 한 가운데 있는 공동 우물에서 샘고사를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수도관을 밖아서 각 가정마다 연결하여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마을 전체가 상수도를 사용하고 있어서 샘고사는 형식적으로 지내고 있다.
⑪송북동 동막마을 井祭
·제의 종류:정제, 거리제
·신위의 형태:우물 2곳, 느티나무
·제장의 위치:마을의 동서 쪽과 입구
·현존여부:오래전부터 거르지 않고 지냄
·제의 일자:매월 음력 정월 초진일
·제수비용:집집 마다 염출
·제의 순서:세곳에서 강신-분향-헌작-배례-송신-소지
·제보자:장창교(남, 50세,송북동)
송탄에서 동쪽으로 난 마을 중에서 막다른 곳에 있다고 하여 동막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처음에는 김해 김씨와 풍양 조씨가 살았으나 다 떠나고 현재는 경주 이씨와 용인 고골에서 이주해온 장씨들이 무여서 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아주 오래 옛날부터 음력 정월 첫 용날인 初辰日에 정제를 지냈는데 처음엔 3군데서 지냈으니 한 곳은 메몰 되고 동쪽에 있는 우물과 시쪽에 있는 우물에서 지내며, 한 우물이 없어진 후에 1976년 당시 이장이던 이준성이 수령 450여년이 된 마을 앞의 느티나무에도 제를 지내자고 하여 그때부터는 두 곳의 우물과 느티나무에서 제를 지내는 정제와 거리제의 복합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무속신앙
무속신앙
해와 달과 별이 있고 바람과 비와 구름을 주관하는 神格이 있어 하늘에 대한 감사 의식은 항상 신성하게 지내졌으며, 그 의식에는 여러 고을의 남녀 노소가 다투듯이 모여들어, 한데 어우러져 주야로 몇 일씩 쉬지 않고 먹과 마시고 춤추고 노래했다는 마을 전체의 공동체적 축제의 연희로 표출되던 제천의식인 맞이굿은, 긴 시간을 전해지면서 그 지역 나름의 독특한 형태로 변화되어 각 마을에서 베풀어지는 도당 굿, 별신굿 등의 마을 굿으로 정착하여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고 원초적인 巫儀式은 이제 금기를 지키고 祭冠이나 祝官, 유사등에 의해서 지내지는 大洞儀禮의 성격으로 변화하였으며 그 형태의 변화와 함께 굿과 제로 양분 되었다.
굿은 전문적인 무격이 행위를 하여 신을 청하고 신탁인 공수를 줌으로써 巫자신이 신격이 되는 형태이고, 제는 단순히 마을의 안녕과 풍농이나 풍어 혹은 개인의 소원 성취를 비는 것으로서 제가 공동체적 행위라고 한다면 굿은 개인적인 기복으로 나타나는데 이렇게 변화되는 과정에서 巫의 위치도 하락되었다.
이미 제천의식인 맞이 굿을 하던 삼한시대에 집제자의 위치가 하락하여 점차 하급 무류인 상민들조차도 천대하던 무격의 위치였으나 최근에는 점술, 예언, 치병, 축귀등을 맡아서 처리하여 그들의 추종세력에게는 다시 집제자의 위치로 돌아서고 있고 또다시 사회적 혼란기를 맞이하자 그 분위기를 틈타 점차 그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더욱 요즈음에는 시대의 흐름으로 무격이 각종 문화재등으로 지정되자 세상의 이목을 피해 음지로 숨어들었던 무들은 이제 다시 세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송탄은 경기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예전부터 최근까지 수원, 화성, 평택등과 함께 경기도 재인청(才人廳)의 관할에 속해 있었으며, 여기에서는 도대방이 있었는데 이 곳은 모든 재인들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도대방에서 관리하는 사람들은 기예인들로서, 악기와 소리꾼은 물른 춤을 추는 무인들과 무속 무를 추는 무격까지도 관리하였다.
송탄과 같이 경기 남부 지방에 속해 같은 종류의 무(巫)의식을 행하는 곳은 수원, 오산, 평택, 화성, 용인, 안성, 남양, 이천, 장호원, 시흥, 과천, 광주, 김포, 강화 등으로 남부 쪽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으며 후에 서울 굿과 혼합되기도 하였다.
요즈음에는 송탄에만 약150여명의 무당이 무업(巫業)에 종사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경기 남부의 무의식은 좀처럼 볼 수 없고, 거의가 선굿과 앉은굿의 복합 형태로 변화된 것만 보인다. 이러한 이유는 경기 남부의 무의식이 세습으로 전해지는 데다 장단과 춤사위가 다양하고 소리가 특이해 배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므로 전문 무격들이 회피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개가 간편하고 쉬운 의식 절차만 습학(習學)하여 손쉽게 굿을 진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전통성은 이미 결여되었으며 무의식을 행함에 있어서도 모두가 약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옛 송탄시
1. 송탄의 상징
시의 새 : 비둘기
시의 나무 : 은행나무
시의 꽃 : 개나리
2. 연혁
651년 고구려의 전성시대 부산현 일부로 편입
875년 신라 경덕왕 16년 진위현
1040년 고려태조 23년 수주임내에 편입
1914년 3월1일 진위군 송탄면으로 개칭
1938년 10월1일 평택군 송탄면으로 개칭
1962년 신장 출장소를 신설
1963년 1월 1일 송탄면이 송탄읍으로 승격
1981년 4월 13일 송탄시로 승격
3. 시민헌장
우리는 명예로운 송탄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숭고한 민족 정신과 애국 의지로 뭉쳐진 유구한 전통의 계승자이며,
찬란한 미래 건설에 이바지하는 민주 시민으로서,
이 헌장을 마음에 새겨 몸소 실천 할 것을 다짐합니다.
1.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을 생활신조로 하여 복된 고장을 이룩합시다.
2. 서로를 사랑하고 한 가족처럼 다정하게 살아갑시다.
3.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정신으로 복지사회 건설에 몸과 마음을 바칩시다.
4. 깨끗한 마음과 바른 행동으로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시민이 됩시다.
5. 아름다운 자연을 가꾸고 새롭고 찬란한 우리 문화를 이룩합시다.
4. 송탄 시민의 노래
송탄이야기 발췌자료
• 송탄시시사편찬위원회 편, 향토사(제1편), 동방인쇄소,1992
• 송탄문화원편집위원회 편, 내고장의 맥(증보판), 동방인쇄소, 1993
• 하주성.김용겸 엮음 , 송탄시의 민속과 설화, 유진애드출판사, 1993
• 송탄문화원 편, 송탄문화 창간호,금강기획,1985
• 송탄문화원 편, 송탄문화 제3집, 영기획,1986
• 송탄문화원 편, 송탄문화 제9집, 동방인쇄소, 1991
• 송탄문화원 편, 송탄문화 제11집, 동방인쇄소, 1992
• 김해규, 평택시민신문(www.pttimes.com)
• www.st119.or.kr
• www.hanter21.co.kr
• 평택문화원 편, 향토사료집 제2편, 합성인쇄소, 1992